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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인 소설가 정세랑
이유민 기자  |  smplym97@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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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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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51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정세랑 작가의 장편 소설 「피프티 피플」 속 작가의 말이다. 정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그만의 세상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사람과 사회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정세랑 작가의 문학 세계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가 보자.


정세랑의 두 번째 목소리, 문학
정 작가는 2010년에 등단한 이후로 문단 문학과 장르 문학 사이를 넘나들며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해온 소설가다. 문단 문학은 문단에서 글의 기교와 형식에 중점을 두고 쓰이는 문학이다. 정 작가는 “문단 문학에는 재능 있는 신인 작가들이 많이 등장해요”라며 “문단 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잡지는 지면이 풍부해 신인 작가들이 안정적으로 데뷔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거든요”라고 문단 문학의 장점을 설명했다. 그는 문단 문학인 「목소리를 드릴게요」로 2013년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장르 문학이란 추리, 무협, 판타지, SF(Science Fiction, 공상 과학 소설) 등 특정한 경향 및 유형에 입각한 문학이다. 정 작가의 작품 중에는 「지구에서 한아뿐」 「보건교사 안은영」 「목소리를 드릴게요」 등이 장르 문학에 속한다. 장르 문학에서는 다른 문학보다 큰 단위의 비유가 가능해진다. 정 작가는 “장르 문학은 시공간을 광활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내면보다는 공동체의 역동적인 변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장르 문학을 읽고 쓸 것으로 짐작해요”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주로 판타지 중심의 장르 문학을 써왔다. 그의 판타지 소설은 눈앞에서 등장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듯 생생한 것이 특징이다. 책 속의 환상이 어디선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 작가의 글은 풍부한 상상력에서 비롯됐다. 정 작가는 작품 준비 과정에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꼼꼼하게 하는 편이지만, 장르 문학을 쓸 땐 충분한 휴식 시간도 갖는다. 그는 “판타지적인 상상은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있을 때 가장 잘 떠올라요”라고 말했다.

그는 장편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을 통해 환경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주인공 ‘한아’는 지구의 환경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정 작가는 한아를 통해 독자들에게 생태계 보호의 필요성과 생명의 신비에 대한 그의 신념을 전하고자 했다. 한아에겐 어린 시절부터 환경과 관련된 동화책을 읽으며 환경주의자로 자란 정 작가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지구에서 한아뿐」은 지난달 프로젝트 ‘책다시숲’의 일환으로서 친환경 특별판인 ‘숲 에디션’으로 재출판됐다. 책다시숲은 교보문고가 출판사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로, 출판 과정에서 재생지를 사용하고 합성 본드 사용을 줄임으로써 최대한 환경을 보존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정 작가는 “그동안 재생지에 콩기름으로 소량만 인쇄하거나 전자책 위주로 소설을 내고 싶었지만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게 부담돼 진행하지 못했어요”라며 “교보문고와 난다 출판사 측에서 먼저 친환경 특별판 출간을 제안해 줘서 기뻤죠”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 출판계가 더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정세랑다운 페미니즘을 책 속에 담다
정 작가의 소설에서는 여성 인물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은 기발한 판타지에 페미니즘과 청소년들의 자살, 동성애, 자본주의에 대한 정 작가의 예리한 통찰을 유쾌하게 녹여낸 작품이다. 퇴마사이자 보건 교사인 주인공 ‘은영’은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로 학교에 나타나는 귀신들을 물리치고 교내 비리를 파헤치는 등 주변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동료 남교사 ‘은표’와의 로맨스도 등장하지만 작품 내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은 은영으로, 은표의 역할은 사건을 헤쳐나는 은영을 옆에서 응원해 주는 데 그친다. 두 인물의 모습은 기존의 로맨스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성 역할의 전복을 보여준다. 이는 이성애 로맨스 서사에서도 여성 인물의 주체성이 유지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많은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아 올해 상반기 넷플릭스(Netflix)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정 작가는 페미니즘 도서 「나다운 페미니즘」의 공동 집필에도 참여했다. 「나다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에 대한 페미니스트 44인의 경험과 의견이 담긴 책으로, 번역 출판 과정에서 국내 작가인 정 작가와 이랑 작가도 함께 참여하게 됐다. 그는 “책을 출판하고 난 후 동시대의 여성들과 연결된 느낌이었어요”라며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응축해 담은 만큼 지금까지 쓴 글 중 가장 아끼는 글이 됐죠”라고 「나다운 페미니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나다운 페미니즘」은 일본에도 번역 출판됐다. 지난해 3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발표한 ‘2019 유리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OECD 29개 회원국 중 29위를, 일본은 28위를 기록했다. 유리천장 지수는 여성의 노동환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매긴 점수다.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은 OECD국 중 유리천장 지수가 최하위인 국가의 국민으로서 「나다운 페미니즘」을 읽으며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 정 작가는 “일본의 독자들이 책의 내용에 공감한다며 보내온 감상을 읽고 가슴이 아팠어요”라며 “아시아 여성들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라고 말했다.

아직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지 않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주의적 도서를 출판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정 작가는 “인터넷에 무작정 책을 비난하는 후기가 끝도 없이 달리고, 특정 웹사이트 사용자들이 집단적인 괴롭힘을 시도할 때도 있어요”라며 “마음이 약해질 때면 동시대의 다른 작가님들을 떠올리며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나란히 걷고 있다고 상상하곤 해요”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최근 문학계에선 점차 여성 서사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여성 서사란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말한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정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을 이어 「82년생 김지영」 「딸에 대하여」 「미스 플라이트」와 같이 여성 서사를 담은 소설들을 차례로 내놓았다. 정 작가는 이러한 문학계의 흐름에 대해 “지난 몇 년간 근사한 캐릭터와 여성 서사들이 다수 등장해 독자로서 무척 만족했어요”라며 “앞으로 여성 서사가 더 풍부해지리라 예상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이제는 발언권을 얻게 됐다고 생각해요”라며 “그 목소리들을 다시 집어넣으려는 기존의 완고한 압력도 있지만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여성 서사 문학이 계속 만들어지기 위해선 정 작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향한 독자들의 지속적인 응원과 연대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세상을 위한 고민을 들려주다
정 작가의 글에는 장르를 아우르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그의 고민이 담겼다는 것이다. 그는 “매번 다른 독자 군을 생각하며 글을 써요”라며 “글의 장르와 밀도를 바꿔가면서 주제와 가장 어울리는 틀을 찾으려고 하죠”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여러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그를 통해 느낀 점을 글로써 독자에게 올곧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서 대중을 마주하기 위한 정 작가의 새로운 도전도 이어지고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드라마화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정 작가는 영상화 작업 참여자들에게 작품을 설명하고 세세한 설정을 다듬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직접 대본 각색에 일부 참여하기도 한다. 그는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협업이다 보니 작품과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향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어요”라며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구분해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지켜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애정을 느껴왔다. 생명체를 향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바로 글이었다. 그는 “지구의 여러 생명체에 경이를 느끼고, 그 생명체의 일부인 인간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인간은 때로 잘못된 선택으로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정 작가는 그러한 미숙함마저 포용하는 동시에, 모든 인간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의 글에는 독자를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은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층을,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은 이들은 무심코 종량제 봉투에 버렸던 플라스틱들을,  「피프티 피플」을 읽은 이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만큼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깨달음을 주는 글은 강하다. 정 작가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은 느리더라도 차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정 작가의 독자들이 그의 글에서 배운 교훈을 실천에 옮기고 나눈다면 언젠가는 책장 바깥의 세상에도 정 작가가 바라는 따뜻한 결말이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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