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거세게 부서지는 소리. 불이 타오르는 소리. 캔버스 위로 붓과 물감이 스치는 소리. 여자들의 노랫소리. 120분의 상영시간 동안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을 채우는 소리들이다. 이 소리들은 관객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영화는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담아낸다. 화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약혼자에게 보낼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엘로이즈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 초상화는 엘로이즈 모르게 완성돼야 한다. 엘로이즈가 약혼자와의 결혼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마리안느를 산책 친구로 소개하고 둘은 함께 집 앞의 바닷가를 산책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얼굴과 손을 관찰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릴 때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눈을 마주치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에 겹쳐지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관객에게 은근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고 두 사람이 마주하는 서로의 눈빛에서 관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불타오르는 여자들의 삶
마리안느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집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의 삶에는 타오르는 불과 같은 생명력이 감돈다. 세 여성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며, 남성들이 금지하고 있지만 여성들에겐 필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 협력한다. 가령 소피가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소피의 임신 중절을 함께 도와주는 것이 그렇다. 들판에서 임신 중절에 필요한 약초를 찾기도 하고, 어느 밤에는 동네의 여자들만이 모이는 축제에 가서 그들의 목소리가 겹쳐 만들어내는 노래를 듣기도 한다. 필자와 비슷한 나이의 관객들은 세 여성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희열을 느꼈다는 감상을 다수 전했는데, 이는 같은 뜻을 가진 여성들이 한 공간에 모여 다른 여성을 지지하는 일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8세기 후반을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들은 오로지 여성들 사이에서 구축한 신뢰와 관계로, 서로를 영원히 이어줄 추억을 만든다. 다른 여성들과 협력하면서 추억을 만드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의 불꽃을 모아 더 강렬하게 타오르도록 해야 한다.

‘여성적 응시’와 영화
감독 셀린 시아마는 마리안느, 엘로이즈, 그리고 소피의 삶을 오로지 ‘여성적 응시(Female Gaze)’로만 그려낸다. 여성 간의 사랑 혹은 여성의 인생을 성적으로 소비했던 이전의 일부 영화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다른 점이다. 감독은 ‘남성적 응시’를 철저히 배제하고 세 명의 여성을 인간으로 마주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가부장적 문화를 계승하지 않고 ‘여성이 사랑하는 여성을 바라볼 때의 시각’으로 두 여성 간의 성적 긴장감, 사랑, 그리고 연대를 보여준다. 그동안 많은 매체에선 우리가 여성의 몸을 성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2013)>와 같이 남성 감독들이 만들어내는 레즈비언(Lesbian) 서사 영화에는, 여성과 여성이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일종의 판타지로 여기며 이를 선정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치중한 작품들이 많았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보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영화다. 여성 감독이 만든 레즈비언 서사 영화에 목말랐던 여성들은 온 힘을 다해 영화의 생명력을 느끼고 서로 생각을 나누며 나아가 연대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을 바라볼 때의 시선이 얼마나 편안하고 평등하며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있게 됐다.

필자는 영화를 두 번 보고 배우들과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봤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는 하나의 집단을 만들 수 있고 영화관은 세상이자 국가가 될 수 있어요”라는 감독의 말이었다. 감독은 이어 “영화가 고향, 나라처럼 느껴지는 거죠”라고 덧붙이며 “그게 영화관의 견해이자 목표니까요”라고 말했다.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를 보는 동안 여성 관객들이 여성들만의 세상 안에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여성 관객들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라는 영화 안에서 외부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을 검열하지도 않으면서 영화를 빌려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됐다. 필자는 감독이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여성들에게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용기를 전해준 것 같다고 느꼈다. 학우들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친구들과 소감을 나눴으면 좋겠다.

경영 17 장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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