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문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15일 오전,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왔다. 고요한 아침 공기와 쌀쌀한 겨울바람에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 내내 눈이 내리는 오타루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엄마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였다. 그래서 비가 우수수 쏟아지던 17일 저녁, 엄마와 함께 또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그 편지는 학창 시절 윤희의 애인이었던 ‘쥰’이 20년 만에 전한 진심이었다. 윤희 몰래 편지를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사는 곳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외면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의 기억에 윤희는 다시금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쥰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으며 기차에 오른다.

매일 아침 통근버스를 타고 공장에 있는 급식소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길에 집 앞에서 남들 눈치를 보며 담배를 태우고, 술에 취하면 집으로 찾아오는 전 남편을 달갑지 않게 돌려보내는 일상. 어딘가 공허한 눈빛, 별다른 표정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보다 견뎌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윤희에게 여행은 어떤 변화를 가져다줬을까.

새하얀 눈이 그칠 줄 모르고 쌓여가는 오타루의 겨울 한가운데서 윤희와 새봄은 각자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 윤희가 쓰지 않는 필름 카메라를 고쳐서 이것저것 사진을 찍던 새봄은 그 카메라가 사실은 윤희가 대학에 못 간 대신 선물받은 카메라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희는 새봄을 찍어주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카메라를 들어 자세를 잡는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윤희의 미소도 화면에 자주 담기기 시작한다.

<윤희에게>는 삶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던 윤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뭐 때문에 사느냐는 딸 새봄의 질문에 ‘자식 때문에 살지’라고 대답하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남은 생을 벌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던 윤희가 더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과거와 화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쥰이 부치지 못한 편지를 대신 부쳐준 것이 쥰의 고모인 ‘마사코’인 점과, 윤희에게 온 편지를 먼저 읽고 여행을 제안한 것이 윤희의 딸 ‘새봄’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서로에게 용기를 내는 것이 두려웠을 윤희와 쥰을 말없이 응원해주고, 이어지도록 도와준 두 여성이 고마웠다.

영화 <윤희에게>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멜로 영화, 퀴어(Queer) 영화, 모녀의 로드 무비(Road Movie)……. 필자는 주변인들에게 이 영화를 ‘배우 김희애 주연의 멜로 영화이자 중년 레즈비언(Lesbian) 여성 서사’라고 소개하곤 한다.

이렇게 여성 간의 사랑,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철저히 이성애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뿐더러, 있더라도 여성혐오적으로 소비되는 경향이 짙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여성이 한 인간으로 그려지도록 레즈비언 서사를 담아낸 영화가 여태껏 얼마나 존재했는가. <윤희에게>가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 이유이다.

필자는 원래 영화를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 여성 영화가 극장에 많이 올라오면서, 특히 영화 <벌새>의 개봉을 시작으로 자타공인 ‘영화광’이 됐다. 이는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히 여성으로서 흠뻑 빠져들어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많아짐에 따라 찾아온 변화이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자, 동시에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여성 주연, 여성 감독, 여성 서사 영화가 점점 많아지면서 판이 뒤바뀌고 있음을 실감한다. 여성 수사물 <걸캅스>, 여성 액션물 <캡틴 마블>과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그리고 <벌새>와 <82년생 김지영>까지. 여성 영화의 부흥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한순간의 유행이 아닌 영화계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를 위해선 여성 영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분석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영화에서 다양한 여성상이 그려지는 시대에 어린 여성들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을지 기대하며 본 글을 마친다.

                                                                                                      미디어 18 강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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