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대표

 

폭력의 최전선에 내몰린 여성들을 위한 *핫 라인(Hot Line)이 있다. 지난 1983년 발족한 ‘한국여성의전화’는 한국 사회 최초로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상담을 도입하고 쉼터를 개설한 회원단체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하 여성폭력)에 무관심한 한국 사회는 ‘네가 조금 참으면 되는 걸 일을 크게 만들어’ ‘너한테도 잘못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등의 2차 가해로 여성폭력 피해를 왜곡하고 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떠넘긴다.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대표는 피해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 속 위축되는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라고 외친다. 본지는 지난 9월 17일(화) 성평등한 세상,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이 없는 세상,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목표로 지난 2015년부터 한국여성의전화를 이끌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고 대표는 “대학 시절 총여학생회로 활동하며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을 내 삶의 중심에 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라며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며 겪은 개인적 문제를 여성운동으로 확장할 수 있었죠”라고 여성운동 시작의 계기를 말했다. 대학 졸업 후 부산광역시에서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 2002년 서울로 자리를 옮겨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교육조직국장, 사무처장, 성폭력상담소장 등 다양한 역할을 거쳐 대표직에 이르기까지 고 대표는 꾸준히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움직였다. 

고 대표가 활동하는 한국여성의전화는 회원제로 운영된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전국 25개 지부 1만 명 회원 규모로 운영되며, 단체 운영 자금의 대부분을 회원 회비로 충당한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선 회원을 ‘활동가’라고 부른다. 활동가가 여성운동의 가치를 삶과 현장에서 주체적으로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향하는 가치에 동의하고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활동가가 될 수 있다. 고 대표는 “성평등한 정책변화나 인식개선의 속도를 내기 위해선 현재 규모 이상의 활동가가 필요하죠”라며 “숙명여대 학생들도 한국여성의전화에 활동가로서 함께하는 걸 고려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참여를 독려했다.

 

여성폭력 피해자의 버팀목
한국여성의전화는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뿐 아니라 성평등한 사회 실현을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진행한다. 고 대표는 “폭력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차별이에요”라며 “여성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꼭 전제돼야 할 것이 성평등한 사회죠”라고 한국여성의전화가 성평등 사회 실현에 주력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주최하는 캠페인은 성차별적 인식 개선과 여성폭력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는 통념을 타파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고 대표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진행하는 대표적인 캠페인으로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와 ‘그런 가족은 필요 없다’를 꼽았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매년 진행하는 캠페인이다. 해당 캠페인은 여성폭력을 사소한 문제, 피해자가 잘못해서 일어나는 문제라고 치부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캠페인을 통해 여성폭력이 성차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그런 가족은 필요 없다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 가족 규범에 반발하는 캠페인으로 ‘정상적인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가치 속에서 은폐되는 가정폭력을 비판한다. 고 대표는 “자신의 신고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깨뜨린다는 피해자의 심리적 압박을 덜어주고자 해당 캠페인을 기획했어요”라고 기획 의도를 말했다. 

고 대표가 캠페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여성폭력 피해자의 경제적·정서적 자립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쉼터로 대피한 가정폭력 피해자 중 40%는 가해자가 있는 가정으로 되돌아간다.  고 대표는 “경제적 문제와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여성폭력 피해자는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아요”라며 “이제는 보호에서 자립 지원으로 틀을 바꿔야 하죠”라고 전했다. 그는 취업 지원과 주거 지원 외에도 정서적 자립을 위한 지원 또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서적 자립의 요소 중 하나는 여성의 ‘**임파워링(Empowering)’이다. 고 대표는 “여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피해의 본질을 알고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을 임파워링이라 규정했어요”라며 “성평등 의식과 주체성을 가지고 가정폭력과 자신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활동에 이런 캠페인들이 많은 도움이 되죠”라고 말했다.

임파워링을 이끄는 대표적 캠페인으로는 가정폭력 피해자로 구성된 문화공연 제작 사업 ‘마음대로, 점프(Jump)!’가 있다. 캠페인 참여자는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주의 의식을 배우고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등 정서적으로도 활발히 교류한다. 비슷한 경험을 나눈 동료들과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과정은 피해자들의 자립 의지에 긍정적인 영향을미친다. 고 대표는 참여자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정서적 관계망에 대해 “이 관계망속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가정폭력의 고통을 극복하는 참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여성폭력의 현실을 알리고 여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지지하기 위해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올해로 13주년을 맞이한 여성 인권영화제 ‘피움’에 관해 고 대표 “피움은 ‘주제가 있는 영화제, 행동하는 영화제’라는 면에서 특별해요”라며 “영화 상영 이후 주최 측 출연진과 관객들이 해당 영화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는 ‘피움 톡!톡!(Fiwom Talk! Talk!)’ 등의 활동을 진행하기도 하죠”라고 말했다. 이로써 관객들은 영화 속에 나타난 여성폭력 문제의 본질을 탐구하고 여성 인권 회복을 위한 다음 행동을 논의하게 된다. 피움을 주최하며 인상 깊었던 상영작으로 고 대표는 제4회 피움 개막작 <침묵을 말하라(Sin by Silence)>를 지목했다. 올리비아 클라우스 감독의 <침묵을 말하라>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폭력에서 탈출하기 위해 가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을 다루는 미국 다큐멘터리다. 그는 “한국여성의전화 또한 일찍이 가정폭력가해자 사망 사건을 ‘가정폭력 정당방위 사건’이라 명명하며 관심 가졌기 때문에 특히 이 다큐멘터리가 기억에 남았어요”라며 지목 이유를 설명했다.

 

수화기 너머 세상을 바꾸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금까지 타 여성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성폭력처벌법)’‘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가정폭력처벌법)’ 제정 등을 끌어냈다. 고 대표는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논의를 예시로 들며 “사법체계가 피해자의 안전과 회복에 온전하게 집중하지 않고 있어요”라며 “폭행과 협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간 피해가 있음에도 피해자에게만 저항 여부를 물어서 강간 여부를 판단하는 관행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죠”라고 법안의 개정 필요성을 주장했다. 현재 한국여성의전화는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 수정 ▶성폭력처벌법에서의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스토킹처벌법’ 제정 등을 촉구하고 있다.

고 대표는 이 중에서도 스토킹처벌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2013년부터 스토킹처벌법 제정을 요구해 왔다. 그는 “수년 전부터 스토킹 범죄의 발생 빈도와 그 피해 사례가 늘고 있어요”라며 “실제로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벌금 8만 원 수준의 경범죄로 취급될 뿐이죠”라고 스토킹 범죄 대책이 미약한 현재 상황에 우려를 표했다.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의 수정은 한국여성의전화가 꾸준히 논의해온 여성폭력 인식개선과도 긴밀한 문제다. 한국여성의전화는 ‘가정폭력처벌법 제1조’의 내용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05년 제정된 해당 법은 제1조에 ‘건전한 가정 육성’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이 문제 돼 수정을 거쳤다. 그러나 수정 이후에도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 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며 피해자 격리 및 안전 보장보다는 가정유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에 고 대표는 “가정폭력 가해자 처벌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법이 가정유지에만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에요”라며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목적조항의 개정은 반드시 시행돼야 해요”라고 말했다. 

고 대표는 성평등한 정책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선 ‘여성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회에 방문해 ‘성평등한 정책변화’를 주제로 당 대표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당시 상황에서 고 대표는 정책 변화를 시도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느끼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여성의 인권과 정의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국회를 견제할 방법은 여성연대예요”라며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질 당시에도 많은 여성이 함께하고 목소리를 냈던 것처럼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많은여성 단체 및 개인의 주목이 필요하죠”라고 여성연대를 타개책으로 꼽았다. 

 

국내 미투(Me Too) 운동의 시작을 이끈 서지현 검사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이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도 아직 많은 여성폭력 피해자가 사회적 통념 속에서 폭력 피해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자책하는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고 대표는 “혹시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폭력 피해자가 있다면 꼭 한국여성의전화에 연락해 주세요”라며 “상담을 통해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아도 함께 힘을 얻고 해결해 가는 과정은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당부했다. 폭력에 내몰린 당신에게 필요한 말이 있다면 수화기를 들고 한국여성의전화에 말을 걸어보는 게 어떨까. 한국여성의전화가 말하는 ‘폭력의 책임’에 당신의 몫은 없을 것이다.

 

*핫라인: 긴급 비상용으로 쓰는 직통 전화를 이름
**임파워링(Empowering): 권한이나 능력을 획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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