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진열대마다 종이 가격표를 꽂아 상품의 가격과 할인 기간을 알리던 시대는 지났다. 요즘 대형마트에서 이용되는 전자가격표시기엔 실시간으로 가격 등의 상품 정보가 갱신된다. 몇몇 기업에선 상품이 진열된 판매대 사이마다 QR코드가 적힌 전자표시기를 배치해 상품을 홍보한다. 마트뿐 아니라 병원과 은행에서도 종이가 전자기기로 대체되고 있다. 종이가 사라지는 현상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걸까? 

 

종이 없는 사회
‘페이퍼리스(Paperless)’는 ‘종이 없는 현상’을 지칭한다. 종이문서에서 디지털 매체로의 변환을 지향하는 페이퍼리스는 최근 금융뿐 아니라 교육, 의료, 법조계 등 여러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금융계에선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대다수 은행 창구에선 태블릿 PC를 이용한 전자 계약서가 기존의 종이문서를 대신하고 있다. 김희경 KEB하나은행 남영지점 과장은 “업무에 태블릿 PC를 적극 활용하면서 기존 방식에선 반드시 거쳐야 했던 절차들이 생략됐다”며 “업무의 부담을 덜 수 있게 돼 편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온라인 전용 앱, *은행 클라우드(Cloud), *블록체인(Block Chain)등을 고객들에게 디지털 서비스로 지원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도 전자 소송 활성화를 통해 종이 사용을 줄이고 있다. 소송절차의 전산화 덕에 재판 당사자는 법원에 가지 않고도 소송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할 수 있다. 이지영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현재 법원에서 민사 재판은 대부분 전자 방식으로 이뤄진다”며 “해당 방식을 이용하면 전자기기 상에서 도표나 그림 등을 복사할 수 있어 판결문을 작성할 때 유용하다”고 말했다. 

서비스업계에선 페이퍼리스를 흔히 접할 수 있다. 최근 대형 마트에선 전자 가격표의 사용이 확대됐다. 전자가격표시제는 과거 종이에 표시했던 상품의 가격을 디지털 장치를 활용해 표시하는 방식이다. 모바일 영수증이나 모바일 영화 티켓 역시 페이퍼리스가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페이퍼리스는 대학의 교육 환경도 변화시키고 있다. 종이 교재만으로 강의를 진행해온 교수들은 파워포인트 자료를 컴퓨터 화면에 띄운 채 강의를 진행한다. 학생 또한 수업자료를 종이로 인쇄해 사용하는 대신 태블릿 PC를 이용해 수업내용을 필기한다. 본교에선 ‘스노우보드’(Snowboard, 이하 스노우보드)를 활용해 온라인 보강, 과제 제출과 출석 관리 등을 진행하고 있다. 본교 김계선 프랑스 언어·문화학과 교수는 “스노우보드를 이용하면 한 학기 수업자료를 한 번에 보관할 수 있어 편리하다”면서도 “스노우보드에 학생들과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페이퍼리스를 통해 종이 생산 비용을 효과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실제로 복합 점포인 대형드럭스토어(Drug Store) ‘올리브영(Olive Young)’은 스마트영수증을 도입한 이후 A4용지 약 1,600만장을 절약했다. 이는 30년 된 나무 1,600그루를 베어내지 않은 셈으로 환경 보호 측면에도 의의가 있다. 또한 페이퍼리스는 문서의 분실이나 훼손의 우려도 적으며 물리적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최재홍 강릉원주대 멀티미디어공학과 교수는 “가상공간의 확대로 더 이상 종이가 필요 없는 상황이 오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페이퍼리스, “아직은 불편해요”
페이퍼리스는 전자문서의 위조나 복제가 용이하다는 위험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법조계에서 형사 재판은 전자 소송 대상에서 제외했다. 전자문서의 경우 증거의 원본을 특정하기 어렵거나 민감한 정보가 복제돼 다량으로 유포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박진수 대법원 재판연구관은 “형사재판에서 사용되는 전자문서엔 피의자나 피해자에 대한 자료가 다수 포함돼 해당 자료가 유포되면 심각한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페이퍼리스는 디지털 정보격차로 인한 문제를 심화하기도 한다. 강수아(독일언어문화 19) 학우는 “온라인으로 티켓을 예매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영화관 방문 시 여석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할아버지를 위해 대신 영화 티켓을 예매해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문서를 자주 사용하는 학우들도 전자문서 사용에 대한 불편사항을 지적했다. 태블릿 PC를 사용 중인 이예림(경제 16) 학우는 “디지털 기기 이용하던 중 발생한 소음으로 타인에게 불편을 준 적이 있다”며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키보드 덮개, 펜촉 보호대 등을 구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 학우 또한 “배터리가 없으면 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기존의 종이문서와 전자문서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는 곳도 존재한다. 정명추 우리은행 부지점장은 “종이문서를 원하는 고객에겐 별도로 종이를 제공해 업무 진행하고 있다”며 “과도기 상태임을 고려해 현재로선 고객에게 종이 서비스와 전자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이 판사는 “전자소송 시에도 본인이 종이를 원할 때엔 종이자료로 소송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지난 4일(수), 본지 기자단은 정보소외계층인 노인들의 은행의 디지털화에 대한 반응을 직접 알아보고자 본교 근처 은행을 방문했다. 노인들이 불편함을 느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전자문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은행 청파동지점에서 만난 박맹임(67)씨는 “내용을 기입하기만 하면 업무가 즉각 처리된다는 점에서 전자문서의 편리함을 느꼈다”며 “기기 사용법에 대한 직원들의 친절한 설명으로 인해 어렵지 않게 업무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KEB하나은행 남영동지점에서 태블릿 PC를 통해 업무를 본 노혜경(58)씨는 “전자문서 사용으로 인한 불안감은 없었다”며 “오히려 업무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아 해당 방식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반응에 정 부지점장은 “전자 업무를 선호하는 노인들이 많다”며 “전자 업무에선 필수정보가 입력되지 않으면 기계를 통한 안내가 이뤄지고, 계약서에 표기된 글자 크기의 확대 및 축소가 자유롭다는 점에서 종이를 사용한 업무보다 훨씬 편리하다”고 말했다. 

 

한 걸음 나아간 페이퍼리스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고객에게 태블릿 PC 사용법을 안내하기 위해 별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정 부지점장은 “사업 초반이다 보니 안내 설명으로 인해 업무가 지체되기도 한다”면서도 “전자문서로의 전환을 위해 취약계층을 위한 안내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과장은 “노인들은 전자문서에 익숙하지 않아 태블릿 PC를 통한 전자업무에 대한 안내가 충분히 이뤄져야한다”며 “모든 연령대가 전자문서에 익숙해진다면 앞으로 더욱 빠른 업무환경이 조성될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에선 매년 디지털 정보격차 해소를 위한 방안을 마련해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2월 보도 자료를 통해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의 생활복지 향상을 위한 기술개발 및 공급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디지털 정보격차 해소를 위해 정보소외계층 대상의 스마트기기 활용교육, 보조기기 개발 및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의 노력은 실제로 디지털 정보격차를 일부 해소했다. 지난 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발표한 장애인, 노년층, 농어민, 저소득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에 관한 ‘2018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반국민 대비 정보취약계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68.9%로, 전년대비 3.8%p 향상됐다. 

현재 정부는 의료 분야로의 페이퍼리스 사업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17년 12월 이래로 ‘종이 없는 사회 실현을 위한 전자문서 이용 활성화 계획’ 사업을 이행하고 있다. 정보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사무관은 “공공, 금융, 유통, 의료 등 4대 분야에서 전자문서 이용을 촉진하는 계획을 수립했다”며 “예산문제로 인해 먼저 계획을 이행할 수 있는 부분부터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종이처방전 전자화 시범 사업’은 처방전등 종이 사용을 줄이고 전자처방전 확산 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한다. 해당 사업을 위해 정부는 전자처방전 발급처리 인프라 사회기반시설 구축을 위한 병의원, 약국 시스템 개발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정 사무관은 “올해 안으로 시스템을 구축한 후 일부 병원 및 약국에 서비스를 시범 도입할 예정이다.


페이퍼리스 현상은 하나의 시대적 흐름이다. 스마트폰이 들어선 이후 2G폰이 점점 사라지듯, 디지털이 보편화된 이후 종이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회는 VR(Virtual Reality), AR(Augmented Reality), 클라우드, 블록체인 등을 상용화하며 다양한 디지털화를 추진할 것이다. 미국 시애틀에서 세계 최초의 무인 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는 ‘아마존고(AmazonGo)’가 대표적인 예다. 아마존고에는 현금도, 점원도 없다. 아마존고 앱을 설치한 손님이 매장에 들어가 물건을 집어 현장을 떠나면 고객의 스마트폰 속 신용카드로 자동 결제된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선 수많은 사람의 공감과 참여가 필요하다. 페이퍼리스는 사람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반면 여전히 이에 소외되는 계층을 만들기도 한다. 페이퍼리스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선 어느 하나 소외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디지털 사회 속 정보소외계층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튼튼한 발판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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