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어느 시인이 노래한대로 숨결처럼 다가오는 봄은 다분히 감각적이다. 바람이 불면 속삭이는 듯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깨어나 우리를 들뜨게 하고 취하게 한다. 그런데 봄의 숨결이자 생명의 전령인 바람이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 몸의 기본단위인 원자는 핵과 그 주위를 회전하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을 압축하면 한 줌이 안 될 정도로 우리 몸은 사실상 허공에 불과하다고 한다. 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은 일종의 ‘관계의 영역’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단단히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우리가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대체로 그렇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공허할 수 있다. 나와 함께 공생의 단위를 이루는 수많은 다른 이들이 ‘나’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고유의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로 정의될 수도 있다. 영향을 나눈다는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땅과 하늘의 모든 부분들과도 이 관계의 영역이 존재할 수 있다. 

봄의 기운이 미세먼지의 광기에 사로잡혀 꼼작 못하는 것 같은 날들을 보내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지다가 남 탓만 먼저 하고 있으려니 일상이 신산하다. 깨진 관계가 있다면 이제는 회복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내 의지만으로 어쩔 수 없는 상대방이라도 내가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걸음을 떼어야 한다. 그러면서 기다릴 수밖에. 과문하여 솔직히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기심에 너무 멀리 가버린 관계들이다. 그래도 회복의 변곡점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이를 늦게 맞기 위한 노력이 후회스럽지 않을 일이다.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라지만 그 결과는 바로 나에게 닥쳐오고 있으니까. 죄수 이론의 프레임에 갇혀 있지 않고 회복을 꿈꾸는 자의 편에 설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거기에 있을 테니까.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 fainting robin, 
I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Emily Elizabeth Dickinson-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