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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리굽쇠> 리뷰

부끄럽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영화 <소리굽쇠>를 본 후, 들었던 생각이다.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본지의 여성부 기자로 활동했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다뤘고 누구보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이 영화를 본 뒤 말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묻고 싶었다. 당신도 스스로 부끄럽지는 않은지.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조명하다
지난달 30일에 개봉한 영화 <소리굽쇠>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다. 두려움에 떨며 목을 매려는 향옥(조안)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귀임(이옥희) 할머니는 목숨을 끊으려는 손녀를 발견하곤 가까스로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 그동안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주인공 귀임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에서 터전을 잡는다. 지금은 손녀와 단 둘이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손녀 향옥이는 한국어를 배우러 한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부푼 기대도 잠시, 향옥이는 할머니의 고국인 한국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할머니의 친척에게 사기를 당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재산을 노리고 덕수(김민상)와 결혼한 조선족 여성이라며 이웃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까지 받는다. 온갖 고난을 겪고 향옥이는 할머니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죽음을 택한다. 

<소리굽쇠>는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끌려가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귀임 할머니부터 히로시마 원폭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덕수, 조선족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향옥이까지. 그 중에서도 귀임 할머니는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지금부터 그녀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를 이야기하려 한다. 그녀가 살아 온 인생의 흔적을 함께 따라가 보지 않으실런지.

◆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그녀들
일제강점기 시대, 밀양에 살던 소녀 귀임은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일본 순사의 말에 속아 중국으로 끌려간다. 그녀가 원한 건 아니었다. 다만 어린 동생을 비롯한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다. 나머지 가족들이 행복하면 그뿐이니까. 나만 고생하면 우리 가족이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비단 귀임 할머니 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여성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어린 소녀들에게 가족의 행복을 떠맡겼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느덧 가족의 생계유지는 그녀들의 몫이 돼 있었다.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귀임 할머니도 그러한 소녀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딸을 낯선 곳에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은 오죽할까. 어머니는 어린 딸을 보내면서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아마도 어머니는 딸이 가게 될 곳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귀임 할머니가 간 곳은 방직공장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중국 위안소였다.

작품 속에서 위안소는 여러모로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식민지 주민에게 그곳은 인권은커녕 생명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장소다. 군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은 귀임 할머니의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이와 동시에 위안소를 ‘젠더 프레임’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위안소 안에는 공격적이고 강력한 남성성과 수동적인 여성성이 존재한다. 이곳에서의 여성들은 남성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성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수동적인 여성성을 요구받는 것이다. 즉, 여성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식민지의 주민이라는 이중적 지위는 식민지 여성들의 고통을 극대화한다.

◆ 그녀들의 또 다른 상처
위안소에서 귀임 할머니는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벼랑 끝에 서 있는 할머니를 붙잡은 건 다름 아닌 한 줄기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힘든 이 상황만 견뎌내면 된다는 희망 말이다. 그녀의 바람이 이뤄진 것일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할머니는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중국인과 결혼을 한다.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귀임 할머니에겐 큰 상처로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녀는 또 다른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임신을 한 귀임 할머니에게 남편은 이렇게 소리친다. “어느 놈 씨인지 알게 뭐야. 몸이나 팔던 위안부 주제에” 남편은 자신의 아내를 전쟁의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내가 어떠한 겪은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단지, 순결하지 않은 여성으로 여길 뿐이다. 이는 귀임 할머니 남편만의 생각이  아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일본군 ‘위안부’의 상처를 감싸 안기는커녕 오히려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으로 몰아갔다. 일본군에게 몸을 ‘버리고’ 돌아온 이들로 취급했다. 실제로 이러한 분위기는 해방된 후에도 그녀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귀임 할머니가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을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개인만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을까. 그렇지 않다. 이는 성별이중규범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성별이중규범이란 남녀의 성정체성과 성역할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논리는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는 여성에게만 적용된다. 오히려 남성에게 성은 사회적 능력을 평가받는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정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귀임 할머니는 결국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한 여성일 뿐이다. 결국 귀임 할머니의 상처를 덧나게 만든 건 일본군도 아닌 바로 우리들이었다.

◆ 아물지 않는 그들의 상처
귀임 할머니의 상처는 여전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날의 고통을 내색하려 하지 않는다. 땔감을 때우고 빨래를 하고 손녀에게 먹일 씨암탉을 잡는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저 평범한 할머니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날의 끔찍한 기억은 할머니를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잠을 청하려 해도 밤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악몽에 시달린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자신의 고통을 돌볼 새도 없다. 손녀는 이제 그만 자신을 놔달라며 목숨을 끊으려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귀임 할머니는 손녀의 얼굴 위로 겹쳐진 할머니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결국 할머니 역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그 날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해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이 스스로 그 기억을 놓아줘야 한다는 것 말이다.

‘소리굽쇠’는 한 쪽이 울리면 다른 한 쪽도 따라 울린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소리굽쇠는 귀임 할머니의 역사적 비극으로 시작된 고통이 세대를 초월해 향옥이의 아픔으로 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슬픔의 울림의 대물림을 막을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슬픔의 울림이 ‘희망의 울림’으로 변져나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귀임 할머니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 해결책이다. 스스로 되묻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에 급급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상처를 망각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뜻하는 정식 명칭이다. 일본군이라는 단어를 넣어 범죄의 주체를 명확히 하고 위안부를 작은따옴표 안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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