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언론을 향한 외부의 쓴소리, 기자들이 사회를 향해 표출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정홍보처가 지난달 22일 ‘국내외 취재지원 시스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정 홍보 시스템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됐다. 개방형 브리핑 제도의 취지와 달리 송고실이 출입기자실로 이용될 뿐이라며 기자실을 감축하려는 정부를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그곳에 전전했던 언론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취재처를 돌고, 더 나아가 취재원을 만나 정보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예상 밖의 복병으로 나타난 것이 그들의 터전인 취재처였던 셈이다.

얼마 전 서울의 어느 학보사에서 성매매업소 르포 기사를 게재해 논란을 일으켰다. 취재처를 자세히 묘사한 기사가 일파만파 퍼지면서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기자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뜨거워졌다.

언뜻보면 전혀 관련없는 두 사례 속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언론과 관련해 ‘비난’ ‘각성’ ‘갈등’ 등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들이 많이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인가 언론을 향해, 그리고 사회를 향해 어두운 면모만을 비추고 비난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무엇이든 세상의 이치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옳고 그름의 구분을 명확히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펜으로 세상을 두드리는 기자도, 이들을 바라보는 독자도 날카로운 눈과 동시에 부드럽고 따뜻한 시각을 지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듯하다.

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학보는 시대를 비판하는 돌파구인 동시에 대학생들 사이에 사랑을 전하던 메신저로써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시대적인 사회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낭만과 사랑의 설레임이 속삭이는 학보, 나아가 여론을 형성하는 언론. 이것은 낯선 세상을 친숙하게 다가가는 또 다른 통로를 제공할 것 같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이곳을 포함한 많은 언론매체, 그리고 이를 접하는 모든 이들이 흉흉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보다 따뜻한 이야기가 더 많이 쏟아지는 사회를 접하기를 기대한다.


현상을 비판하는 돌파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적인 사랑과 훈훈함을 전해주는 다리가 되기 위해 언론 뿐 아니라 같은 울타리 내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따뜻함이 묻어나는 사회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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