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칼럼]

좋은 문장은 쉽게 쓰이지 않는다. 글의 삼박자가 완벽하게 맞춰져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글의 삼박자는 ▶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 ▶흐름을 읽는 능력 ▶기상천외한 단어들이다. 이들이 조화를 이룰 때 작성하는 문장은 백 문장이든, 천 문장이든 모두 좋은 문장이 된다. 그러나 삼박자는 꽤 까다로워 순순히 맞춰지지 않는다. 

첫 번째 조건인 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그나마 쉬운 편이다. 담당 기자가 돼 기사와 인사한 순간부터 기자는 ‘기사 대변인’이 된다. 취재는 누구보다 기사의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사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의문에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늘 기자는 ‘나’의 기사를 변호해야 한다. 

두 번째, 세 번째 조건이 필자에겐 특히 힘든 관문이었다. 기사와 가까이하는 담당 기자는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기 일쑤다. 매끄러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선 기사에서 한 발짝 물러나 들여다보는 자세가 필요하지만 늘 어려웠다. 기상천외한 단어는 다음 생에나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자의 뇌 속에 있는 뉴런(Neuron)은 그런 단어를 생산해 낼 수 없었다. 아직도 근사한 단어는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장에 꼭 맞는 단어를 찾아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단 사실을 알게 됐다. 

본지에 들어오기 전 필자의 꿈은 과학자였다.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나 파스퇴르(Pasteur) 같은 과학자가 돼 세상을 따뜻한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가 꿈꾼 과학자엔 ‘타인’만 존재했다. 타인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과학자가 가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신문을 대할 때 필자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 중점을 둔다. 독자를 위해 쓰인 신문은 모순되게도 필자에게 더 큰 영향을 줬다. 신문을 만들며 기뻐하고, 절망하는 경험은 필자를 성장시켰다. 조금 더 ‘기쁘기’ 위해 좋은 문장을 고민하고 조금 더 ‘보람을 느끼기’ 위해 진심을 다했다. 본지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색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신문 만들기와 같이 유채색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타인’만이 아닌 ‘나 자신’의 목소리부터 집중하는 필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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