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읽다 관심을 갖게 된 두 작가가 있다. 박완서 작가와 권여선 작가다. 특히 권여선 작가는 요즘 「사슴벌레식 문답」이란 소설로 주목받고 있다. 모든 서점의 매대마다 이 소설책이 놓여있다. 필자는 이 책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을 사놓고 4년 내내 방치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필자는 계속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거절하고 끝내며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이 소설을 읽었다.

「사슴벌레식 문답」엔 인물 4명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준희와 부영, 정원, 경애는 대학 시절 같은 하숙집에 살았다. 필자는 그들의 하숙 생활을 엿보며 부영이 정원을 사랑했단 것을 느꼈다. 철없는 준희는 그 모습을 부러워했다. 경애는 언제나 사라지고 싶어 했으나 거짓말쟁이였다. 살고 싶다면서도 그 뒷말엔 많은 허무함이 있었다. 정원이 죽고 20년이 지난 뒤 준희는 부영을 만났다. 경애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사슴벌레식 문답’을 처음 경험한 건 정원과 준희다. 이 두 사람은 ‘사슴벌레는 어떻게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란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정원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경애는 부영을 배신한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무너진 준희는 사슴벌레식 문답의 잔인함을 배운다. 무너진 이들과 정원의 관계는 이 문답의 잔인함에서 비롯됐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 모르기도 했다.’
소설 첫 문단에 나오는 문장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짐작했대도 다가오는 감정은 여전히 쓸쓸하구나.’ 준희는 정원의 극단적 선택을 예상했을까. 부영은 경애가 자신을 배신할 줄 알았을까. 네 사람은 그 여행이 마지막일 거라고 예상했을까. 사슴벌레식 문답 앞에 이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럴 때가 돼서, 그게 운명이라서, 정원은 그때 어떤 방식으로도 죽었을 거야.’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영원치 않으니까.’

필자는 잘 쓰인 소설을 무서워한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두렵다. 고개를 파묻고 누군가를 부르고 싶어진다. 필자 인생 속 여러 관계를 곱씹는다. 지구에 있는 필자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여러 생각에 휩싸이지만 허무함에서 비롯된 외로움은 결국 ‘허무함’이란 결론을 내렸다. 

필자는 이 결론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 사람을 어떻게 미워해, 그 사람을 어떻게든 미워하면 되지, 어떻게 사랑을 해, 어떻게든 사랑하면 되지, 어떻게 이 삶을 이겨내, 어떻게든 이 삶을 이겨내면 되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으면 되지’.

필자와 당신의 웃음은 프레임(Frame)의 한 장면이 된다. 떨어지는 눈물은 휴지와 함께 비닐 속에 봉인된다. 기억은 희미하고 과거는 집착이 되고 미래는 암담한 터널 같다. 지금은 태양이 이렇게나 밝은데 저것들은 우릴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필자의 친구는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고 필자 또한 그들의 목을 막을 수 있다. 허탈함이란 날이 투명한 벽이 되어 지금 앞에 서 있는데 우린 모른다. 투명한 벽은 언제든지 재해석돼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갇혔다. 

관현악 21 양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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