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문화]

자신이 미친 듯이 달리는 경주마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회색 신사’와 거래한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많은 시간을 뺏기는 악마의 거래.

소설 「모모」의 주인공 모모는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어떤 이야기든 술술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해결책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 이런 모모를 좋아했고 모모 역시 마을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모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모모는 그들을 찾아 나섰다. 모모는 그들이 회색 신사와 거래한 이후 더 이상 모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단 사실을 알았다. 모모와 호라 박사는 마을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면 나중에 여유로워질 수 있단 회색 신사의 유혹에 넘어갔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회색 신사를 물리치고 마을 사람들의 시간을 되찾는다.

회색 신사를 물리치는 모모의 이야기가 언뜻 유치한 어린이 소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독자가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소설 속에서 모모와 회색 신사는 선과 악으로 대비된다. 독자는 모모를 응원하지만 책을 덮은 후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한다. 소설 속 회색 신사는 미래에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돈과 미래를 위해 시간을 아끼는 현대인의 삶을 엿본 것처럼 날카롭다. 이런 태도가 ‘문제 될 게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아끼다 놓쳐버린 것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 속에선 우리가 놓친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발사 푸지 씨는 다리가 아픈 다리아 양에게 꽃을 선물하기 위해 매일 30분을 들여 그녀의 집에 방문했다. 회색 신사는 푸지 씨를 유혹해 다리아 양에게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발소에 방문하는 고객과의 잡담 시간과 머리 손질 시간도 줄인다. 회색 신사는 푸지 씨에게 시간을 아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푸지 씨는 다리아 양과 함께하며 받았던 응원과 미소를 잃는다. 이발사로 일하는 자신의 긍지도 사라졌다.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겠단 목표 때문에 현재의 삶이 온통 잿빛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현대인은 시간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필자의 삶을 돌아보니 언젠가부터 가족들과 느긋하게 TV를 보는 시간을 사치로 여겼단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우린 회색 신사와 악마의 거래를 하고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설악산을 약 두 시간 등반하면 만날 수 있는 백담사엔 ‘내려오는 길에 보았네, 올라오는 길에는 보지 못한 그 꽃’이란 시가 적혀 있다. 우린 목표로 삼은 정상에 오르며 설악산에 핀 예쁜 꽃을 놓친 게 아니었을까.

행정 22 정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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