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의 좌우명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자’다. 그는 지난 1985년 본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여성 활동가, 정책연구원, 교수의 직업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이 교수는 현장에 있는 여성단체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하는데도 능력을 쏟았다. 이 교수는 도움이 필요한 여성에게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사회초년생의 경험, 베테랑 여성활동가를 만들다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 사회엔 성희롱과 성폭행이란 단어가 없었다. 당대 여성은 성별에 따른 불평등을 자각하기 어려웠다. 이 교수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정당, 국회 등 다양한 기관에서 일하며 성 불평등의 존재를 가시화하고 이를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여성이 차별받고 있단 사실을 몸소 느꼈어요. 지난 1985년 국회 외무위원회(현 외무통일위원회) 위원장실 비서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1년 정도 일하다 보니 입사 동기인 남자 비서와 제가 하는 일이 다르단 걸 알았어요. 남자 동기는 의원의 일정을 관리하고 대외 업무를 처리했어요. 제 일은 비서실에서 전화를 받고 타자를 치며 커피를 타는 게 전부였죠. 이런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해 사표를 냈어요. 이후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해결하고자 우리나라의 대표 여성단체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입사했죠.

지난 1986년부터 8년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활동하셨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대중매체 속 성 상품화를 근절하고자 노력했어요. 1990년대 TV와 잡지 광고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문제가 심각했죠. 특히 자동차와 술 광고는 상품과 관계없이 여성의 신체를 과도하게 드러냈어요. 그래서 여성을 성 상품화한 방송국과 잡지사에 시정을 요구했어요. 공정거래위원회에 광고 규제 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도 벌였어요. 활동 후 광고의 선정성 수위가 낮아졌다고 느꼈어요.

지난 1995년부터 7년간 대통령인수위원회에서 행정관으로 활동하셨어요. 어떤 일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가사노동을 가시화하는 일에 앞장섰어요. 당시 가사노동은 임금을 받지 못한단 이유로 평가절하됐어요. 가사노동의 가치가 경제적으로 인정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노동의 강도를 측정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기존 인구주택총조사에 가족 구성원의 형태와 가사노동의 담당자를 파악하는 문항을 추가했죠. 피부양자의 나이와 수 등의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 노동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조사를 토대로 가사노동이 포함된 통계가 처음으로 도출돼 흡족했어요.

여성 활동가로서 가장 애정을 갖고 참여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성 정책을 직접 만드는 일이 가장 재밌고 흥분됐어요. 지난 1999년 국회 정책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가정폭력금지법’ ‘성폭력방지법’을 제안했어요. 정책 수립 전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자 공청회도 기획했죠.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관한법률’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어요. 여성을 위한 법안에 제 흔적이 묻어 뿌듯함이 컸죠.

■여성단체와 정부를 잇는 연결고리
이 교수는 지난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하 진흥원)’에서 초대 원장으로 활약했다. 진흥원은 지난 2004년 제정된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출범한 여성부(현 여성가족부) 산하의 재단법인이다. 이 교수는 진흥원에서 여성단체와 정부를 이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했다. 또한 성매매 산업을 타파하고자 성매매 방지 정책 사업을 주도했다. 과거 여성기관에서 실무를 도맡아온 그의 경험은 진흥원에서 빛을 발했다.

진흥원의 초대 원장직을 수락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현장에서 활동하며 활동가와 정부를 연결하고 싶었어요. 현장 활동가는 정부의 정책 운영 방식을 잘 몰라요. 정부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을 자세히 알기 힘들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여성 정책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어려워요. 진흥원은 이 둘의 거리를 좁히는 것을 목표로 해요. 그동안 여성기관에서 일한 경험이 많기에 이 일을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요

진흥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정부의 여성단체 감사 지침을 개선했어요. 당시 여성단체는 현장을 잘 모르는 정부가 제시한 감사 기준을 수용할 수 없다며 불만을 표출했어요.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정량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비용을 지출하는 경우가 많아요. 탈 성매매한 여성이 성매매 업소 운영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사용한 택시비가 그 예죠. 수백 명의 대표자들과 지침의 각 문항을 한 문장씩 읽어가며 내용을 수정했어요. 50번이 넘는 회의를 거듭해 완성된 새로운 감사지침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죠.

성매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국가 간 연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국가 간 연대 활동은 성매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에요. 성매매가 국제적인 사업으로 확대됐기 때문이죠. 선진국에서 발생하는 성매매의 피해자는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여성들이에요.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정책은 턱없이 부족하죠. 특히 취약한 환경에 노출된 아시아 여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당 국가와 연대하는 데 집중해야 해요.

 

▲지난 2020년 본교 아시아여성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본교 아시아여성연구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본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여성학 교수, 현장을 강의하다
현재 이 교수는 본교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여성과리더십’이란 여성학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학우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여성 리더로서 마주할 수 있는 성별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의 교육철학은 ‘삶의 주인공이 돼라’다.

본교에서 17년째 여성학을 가르치고 계세요. 여성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여성학을 알아야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어요. 이론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확히 정의할 수 있으면 위기를 극복할 힘이 생겨요. 반면 이론적 뒷받침이 부실하면 해결책을 찾기 어렵죠. 조직마다 여성문제를 전담하는 부서와 처벌이 존재함에도 피해자들은 결국 조직을 떠나요. 그들이 참을성이 없거나 무기력한 사람들이어서 포기하는 게 아니에요. 사건의 본질과 절차를 잘 알아야 성별에 따른 부당한 일임을 깨닫고 이를 해결할 수 있어요.

여성학을 가르치며 가장 보람찬 순간은 언제였나요?
사회에서 곤경에 처한 제자들이 배운 것을 토대로 문제를 헤쳐 나가면 정말 뿌듯해요. 10년 전 여성학 수업을 들었던 학생에게 장문의 감사 메일을 받은 적이 있어요. 학생은 처음 회사에 들어간 뒤 남성 직원들에게 동료로서 존중받지 못해 퇴사를 고민했다고 해요. 그러나 제가 수업 시간에 언급한 해결전략과 사례를 적용해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했죠. 제자는 지금 승진을 앞둔 8년 차 회사원이 됐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 표창을 받는 것보다 더 큰 보람을 느꼈어요. 

본교를 졸업한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숙명인이 사회에 나가 멋진 인재로 성장하길 소망해요. 지난 1906년 본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설립한 순헌황귀비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본인의 지위를 극복하고 여성 교육기관을 세웠어요. 우리가 순헌황귀비의 전통을 이어가는 후예임을 자각했으면 좋겠어요. 후배들이 ‘Rule Taker(규칙을 따르는 사람)’가 아닌 ‘Rule Setter(규칙을 만드는 사람)’가 되길 바라요.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는 여성을 위해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가 이뤄온 일들은 모든 여성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잔 확실한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학우들도 자신이 추구하는 지향점을 향해 달려가 보는 건 어떨까. 그 발걸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한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의 모습이다.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한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학부 교수의 모습이다. <사진제공=본교 아시아여성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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