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을 걷다 보면 본교 곳곳에서 여러 대자보를 발견할 수 있다. 대자보는 전지에 큰 글씨로 자신의 의견을 적은 글을 뜻한다. 오민지(한국어문 18) 학우는 “대자보를 작성하며 개인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자보는 대학교를 넘어 사회에 청년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대학에 온 ‘벽신문’
‘대자보’의 원형은 1960년대부터 활용된 로마제국의 ‘벽신문’이다. 고대 로마제국의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광장에 벽신문을 붙여 시민들에게 나라 안팎의 소식을 전했다. 벽신문은 세계 각국으로 확산됐다. 1950년대 중국 공산당에선 벽신문을 대자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자보는 중국 공산당의 *문화대혁명 이후 정치 선전 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중국 전역엔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하는 대자보가 다수 부착됐다.

국내에 유입된 대자보는 1980년대 성행하며 대표적인 대학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대자보를 작성하며 신군부 독재 정권에 대항했다. 당시 대자보는 가장 공신력 있는 정보전달 매체였다.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지난 1988년 ‘대학생의 집단행동과 대자보, 유언비어, 지하간행물에 대한 공신력 연구’에선 대자보의 사회적 역할을 조사했다. 조사에 따르면 학생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연구 대상자 298명 중 59.1%가 대자보를 주요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세력이 쇠퇴하자 대학가 대자보 문화도 힘을 잃었다.

2010년대에 들어 대학가의 대자보 문화는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대자보 문화의 부활을 알린 건 지난 2010년 김예슬 씨가 붙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였다. 당시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김 씨는 대학가의 과열된 ‘스펙 쌓기’ 현상을 비판하고자 대자보를 부착하고 1인 시위를 펼쳤다. 김 씨의 주장은 YTN, JTBC 등의 뉴스와 신문사 1면에 보도되는 등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지난 2013년엔 고려대 재학생 주현우 씨가 ‘안녕들 하십니까’란 제목의 대자보를 붙여 화제를 모았다. 주 씨는 해당 대자보에서 철도 민영화 반대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주장했다. 같은 내용이 게시된 SNS 글의 좋아요 수는 나흘 만에 23만개를 돌파했다. 약 한 달간 600개가 넘는 전국 대학엔 같은 제목의 대자보가 부착됐다. 주 씨를 포함한 대학생 약 100명은 철도파업 지지를 선언하는 촛불집회에도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대자보가 붙어있는 본교 제1캠퍼스 명신관 앞 게시판이다.
▲대자보가 붙어있는 본교 제1캠퍼스 명신관 앞 게시판이다.

 

대학사회의 증인이 되다
‘열린 매체’인 대자보는 대학 사회에서 공론장을 만든다. 의견을 전달하는 주체가 언론인으로 한정된 기성 언론과 달리 대자보는 누구나 작성 가능하다. 대학생들은 제약 없이 대자보를 활용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윤성현(홍보광고 19) 학우는 “교내 게시판엔 소수 의견과 다수의견이 같은 공간에 게시된다”며 “대자보를 활용하면 소수 의견도 공평하게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에 따르면 대중은 매체를 이용해 소통하며 정보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다. 대자보를 읽은 개인은 자신이 수용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자보를 작성한다. 하나의 대자보에서 파생된 여러 개의 대자보는 새로운 여론을 탄생시킨다. 그 결과 공론장이 확장돼 폭넓은 논의가 가능해진다. 

▲인하대 독립교지 ‘인하목소리’가 지난 7월 게시한 대자보 ‘당신의 목소리를 키워 응답해주세요’다.
▲인하대 독립교지 ‘인하목소리’가 지난 7월 게시한 대자보 ‘당신의 목소리를 키워 응답해주세요’다. <사진제공=인하목소리>

 

대자보는 대학 내 은폐된 문제를 고발한다. 지난 2016년 고려대엔 ‘잘 살 것이다’란 제목의 교내 성범죄 고발 대자보가, 서울대엔 SNS 단체 대화방의 성희롱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게시되며 학내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지난 7월 인하대 독립교지 ‘인하목소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키워 응답해주세요’란 제목의 대자보를 붙였다. 해당 대자보는 지난 7월 인하대에서 발생한 성폭행 추락사 사건을 계기로 작성됐다. 인하목소리는 대자보에서 성차별 문제의 언급이 금기시되는 대학가 분위기를 비판했다. 인하목소리 소속의 익명을 요구한 학생은 “지금까지 인하대에 대자보가 게시된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며 “교내 성범죄 사건 발생 후 학생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인하목소리의 대자보를 읽은 윤 학우는 “해당 대자보는 모두가 숨기던 문제를 지적한 용기의 상징물이다”고 의견을 말했다.

학우들도 교내 게시판의 대자보를 공론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2017년 본교 중앙여성학동아리 SFA는 본교 교수들의 여성혐오 발언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지난 2019년 본교 사회과학대 학생회는 총장직선제 실시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게시했다. 해당 대자보는 지난 2020년 본교에서 첫 총장직선제가 치러지는 데 기여했다. 지난 5월엔 본교 청소노동자 시위에 연대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부착됐다. 윤 학우는 “본교엔 여성의 일상부터 정치 담론까지 여러 내용을 담은 대자보가 등장한다”며 “학우들과 의견을 공유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시대를 기록하는 오늘의 대자보 
대자보는 점점 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대학생은 정치적 사건의 피해자이자 목격자로서 대자보를 작성하기도 한다. 지난 2015년 정부에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검토한단 사실을 발표하자 일부 대학생들은 대자보로 검토 철회를 요구했다. 연세대엔 북한식 말투를 활용한 ‘국정 교과서를 찬성하는 우리의 립장’이란 대자보가 게시됐다. 해당 대자보를 작성한 학생은 북한 노동신문의 문체를 활용해 국정교과서 정책이 북한의 독재 정책과 유사하단 주장을 드러냈다. 지난 2016년엔 정유라 씨의 성적 특혜로 피해를 본 이화여대 학생들이 대자보를 부착했다. 이후 이화여대 곳곳에 게시된 대자보는 정 씨의 성적 비리를 폭로해 교육부의 감사 시행에 영향을 줬다. 

▲지난 2018년 본교 중앙여성학동아리 ‘SFA’가 게시한 대자보 ‘내가 쓰는 탈코일기’다. 사진제공=SFA
▲지난 2018년 본교 중앙여성학동아리 ‘SFA’가 게시한 대자보 ‘내가 쓰는 탈코일기’다. <사진제공=SFA>

 

오늘날의 ‘참여형 대자보’는 더욱 발전된 논의를 제공한다. 큰 글씨로 전지를 채우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식의 대자보가 등장하고 있다. 각자의 의견을 포스트잇에 적어 전지에 붙이는 ‘릴레이 대자보’나 종이를 고리 모양으로 연결하는 ‘띠 대자보’가 그 예다. 참여형 대자보는 많은 사람의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다. 지난 2018년 SFA는 ‘내가 쓰는 탈코일기’란 제목의 참여형 대자보를 부착했다. 학우들은 자신의 ‘탈코르셋’ 경험을 작성해 빈 종이를 채워나갔다. 해당 대자보 기획에 참여한 김민경(법 16) 학우는 “대자보를 매개로 학우들과 나눈 소통이 탈코르셋 담론 확장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김 학우와 함께 참여형 대자보를 기획한 오민지(한국어문 18) 학우는 “대자보를 보고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한 학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은 대자보 속 담론이 사회로 확산하길 바란다. 대중은 대자보 작성 사실보단 그 속에 담긴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인하목소리 소속의 익명을 요구한 학생은 “최근 대자보를 읽은 대중이 ‘대단하다’ ‘아직도 이런 대학생이 있다’ 정도의 가벼운 반응만 보여 아쉽다”고 말했다. 인하목소리 소속의 익명을 요구한 학생은 “대학생이 아닌 대중도 대학 대자보의 메시지에 응답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 장의 대자보와 한 사람의 행동이 수백만개 돌멩이의 외침이 되어 거대한 분리 장벽을 향해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난 2010년 대학 재학 중 대자보를 작성한 김예슬 씨의 저서 「김예슬 선언」 속 문장이다. SNS를 활용한 소통이 주류로 여겨지는 현재에도 대자보의 가치는 여전하다. 인하대 독립교지 ‘인하목소리’ 소속 익명을 요구한 학생은 “대자보를 읽은 사람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직접 행동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명의 학생이 용기 내 작성한 대자보는 돌멩이가 된다. 돌멩이가 된 대자보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균열을 내길 바란다면, 교내 게시판에 부착된 대자보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문화대혁명: 지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사회주의 운동임.

 

참고문헌
김민하.(2014). ‘안녕들 하십니까’의 시대정신. 황해문화, 82, 232-248.
김영빈, 한혜경, 김무규.(2015). 선택적 토대와 거부의 소통: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과 루만의 체계 이론적 커뮤니케이션. 한국언론정보학보, 71(3), 224-245.
최재훈.(2017). 집합행동의 개인화와 사회운동 레퍼토리의 변화. 경제와사회, 113, 66-94.
최주영.(2020). 대자보의 기록화 필요성과 발전방향 : 대자보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김예슬, 「김예슬 선언」, 느린걸음, 2010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안녕들 하십니까?」, 오월의 봄, 2014
김영우.(2014.01.06.) “원시적 매체 ‘대자보’ 열풍이 왜 다시 불까요”, 한겨레신문.
장재진.(2015.11.05.) “[까톡2030] 빽빽한 선언문은 가라, 대자보의 변신”, 한국일보.
정영민.(2016.11.11.) “그들은 왜 대자보를 쓰는가”,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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