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미국 물리학회(The American Physical Society)에 한국인 최초 회장이 탄생했다.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University of Chicago) 물리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김 교수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주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본지 기자단은 지난달 12일(화) 미국 시카고(Chicago)에 있는 김 교수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에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기까지, 김 교수의 오랜 여정을 함께 돌아봤다.

 

입자물리학에 빠진 ‘학생 김영기’
중학교 시절 김 교수는 경시대회를 준비하며 과학과 친해졌다. 작은 도시인 경상북도 경산시에 살던 그는 도내 과학 경시대회에서 우승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는 “경시대회를 준비하기 이전엔 수학에만 관심이 있었어요”라며 “과학 지식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공부에 덤벼들어 열심히 대회를 준비했죠”라고 회상했다. 대회에서 우승한 뒤 얻은 자신감은 그가 추후 과학자로 진로를 설정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고려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수학과 과학에 대한 흥미를 이어갔다. 물리학은 이론과 논리를 중시하는 김 교수에게 적합한 학문이었다. 4학년이 된 그는 강주상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의 강의를 듣고 물리학의 세부 학문인 입자물리학에 입문했다. 입자물리학은 물질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원자보다 작은 *양성자, 중성자 등의 **소립자를 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해당 학문에선 소립자의 성질을 파악하고 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그는 “강 교수님의 명쾌한 입자물리학 강의가 인상 깊었어요”라며 “석사 과정도 강 교수님의 지도하에 밟았죠”라고 회상했다.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김 교수는 입자물리학 실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미국 로체스터대(University of Rochester)에서 박사 과정을 지내며 실험 연구에 관심을 뒀다. 그는 “지도 교수님께서 충돌 실험, 입자 가속 실험 등 입자물리학의 여러 실험 연구를 가르쳐 주셨어요”라며 “당시 배운 연구에 큰 재미를 느껴 실험 분야에 몰두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입자물리학에선 입자에 에너지를 가해 서로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실험이 진행된다. 충돌한 입자들은 잘게 분해돼 모든 입자가 흩어져 있던 우주 초창기 환경을 구현한다. 연구자들은 해당 과정을 통해 우주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 

그는 입자물리학이 인간의 철학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매우 작은 입자들은 입자물리학의 주요 관심사다. 김 교수는 “대중은 오래전부터 ‘우리를 만드는 가장 작은 요소’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었어요”라며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면서 생명체를 이루는 기본 물질이 모두 동일하단 사실을 알게 됐죠”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입자물리학 연구를 통해 우주의 시초가 된 입자를 알아낼 수 있어 기뻐요”라고 덧붙였다.

▲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University of Chicago) 물리학과 교수가 연구 자료를 탐독하고 있다.
▲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University of Chicago) 물리학과 교수가 연구 자료를 탐독하고 있다.

 

동서양 아우르는 '물리학 리더'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에서의 활동은 김 교수를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성장시켰다. 그는 지난 1990년부터 2006년까지 해당 연구소에서 연구원, 단체 대표, 부소장을 연이어 맡았다. 당시 김 교수는 소립자의 성질과 근원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양성자와 ****반양성자를 가속하는 장비 ‘테바트론(Tevatron)’을 활용한 입자 충돌실험은 그가 참여한 대표적 연구다. 김 교수는 실험 운영, 데이터 분석 등 연구 전반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일도 수행했다. 그는 “부소장으로 취임해 가속기의 설립 계획을 주도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라며 “가속기 건설엔 수십 년이 소요되기에 학계의 미래를 내다보는 법을 배웠죠”라고 말했다. 그는 해당 연구소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2004년 미국 물리학회의 석학 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 물리학회 회장으로 당선된 그는 학계를 주도하는 최고 리더 자리에 섰다. 미국 물리학회는 20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막강한 영향력의 연구단체다. 김 교수는 5만 명이 넘는 물리학회 회원들의 투표를 거쳐 최종 선출됐다. 그는 “물리학계를 이끄는 자리이기에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라며 “주위 연구자들이 저를 신뢰하고 있단 것을 깨달아 책임감이 커졌죠”라고 말했다. 현재 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 교수는 오는 2024년부터 회장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그는 “최근엔 학회가 주관하는 여러 과학 시상식을 진행하고 미국 정부의 물리 정책을 자문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차세대 한인 과학자 양성은 김 교수의 목표 중 하나다. 그는 지난달 1일(월)부터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해당 협회는 한미 과학교류 촉진과 한인 과학자 양성을 목표로 삼는다. 그는 “멘토링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연구자 간 네트워크를 형성할 예정이에요”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한인뿐 아니라 동양인 리더를 향한 학계의 선입견이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동양인은 주입식 교육을 받기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라며 “그들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과학계가 주도해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 김 교수가 입자물리학 실험 현장에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 김 교수가 입자물리학 실험 현장에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포용의 정신, 연구에 담기다
김 교수는 물리학계 수장으로서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고자 한다. 그는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중시한다. 다양성이 과학 기술 개발에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각자의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이 모이면 기술이 더 빠르게 성장한단 걸 깨달았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종, 성별, 국적 등에 상관없이 모든 과학자가 평등한 연구 기회와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 교수는 “물리학회 회장에 취임한 뒤 연구자들을 위해 비자 정책이나 과학 정책을 꾸준히 살피고 개선해나갈 예정이에요”라고 말했다. 

여성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김 교수는 지난 2016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여성 최초로 물리학과 학과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현재까지 학과장을 연임하며 여성 동료를 위한 정책을 마련해왔다. 그는 “전 동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증명해야만 했어요”라며 “처음 강단에 올랐을 땐 체구가 작은 겉모습만 보고 저를 조교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죠”라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업무와 육아를 병행하는 동료들을 위해 교내 어린이집을 설립했다. 그는 자녀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회의 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다. 김 교수가 주도하는 여성 학과장 모임에선 여성 연구자 간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김 교수는 연구자들 간 의견 충돌을 소중히 여긴다. 그는 연구자 사이의 의견 충돌이 입자를 충돌시키는 실험 과정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김 교수는 “서로 다른 배경의 동료들과 연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의견 충돌이 발생해요”라며 “토론을 거듭하며 충돌하다 보면 막히던 연구 과제가 해결되죠”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 함께 의견을 교류하면 혼자 연구할 때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그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마음으로 연구하며 자연법칙의 비밀을 밝혀낼 예정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란 뜻의 경천애인은 김 교수의 아버지가 그에게 직접 가르쳐준 사자성어다. 그는 경천애인의 ‘하늘’을 ‘자연법칙’으로 해석해 자신의 연구 신조로 삼아왔다. 그는 “제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포용성 역시 경천애인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라며 “앞으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밝혀지지 않은 여러 입자의 성질을 연구할 예정이에요”라고 말했다.

▲ 김 교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김 교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를 연구하는 일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입자물리학의 최종 목표는 세상의 근본이 되는 입자를 알아내는 것이다. 해당 목적을 위해 시작된 기본입자 17개에 대한 증명은 지난 2012년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김영기 미국 시카고대 물리학과 교수는 삶과 연구 과정이 모두 인내심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가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에선 특유의 재치가 느껴졌다. 그는 “자부심을 갖고 끈적끈적하게, 천천히 가도 돼요”라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신을 탐색하길 제안한다. 김 교수의 말처럼 서두르지 않고 묵묵히 노력해보자. 모든 노력은 ‘나’를 이루는 입자가 돼 완성된 결과로 다가올 것이다. 

 

*양성자: 소립자의 한 종류로 원자를 이루는 구성 요소 중 하나임.
**소립자: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 중 가장 작은 단위를 이르는 말임.
***가속기: 전기장이나 자기장 속에서 입자를 가속시켜 고에너지 상태로 만드는 장비임.
****반양성자: 소립자의 한 종류로 양성자와 반대의 전하를 띄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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