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선율은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가 닿았을까. 재즈는 미국 뉴올리언스(New Orleans) 지역에서 강제 노역하던 흑인의 입에서 처음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 뉴딜 정책 시행과 같은 주요 사건과 함께 변화를 거듭했다. 재즈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다. 


#흑인의 목소리를 품다
초창기 재즈엔 19세기 미국으로 강제 이주된 흑인 노예의 애환이 담겼다. 흑인들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뉴올리언스로 옮겨져 강제 노역을 해야만 했다. 당시 목화 농가에서 일하던 흑인들은 초창기 재즈의 한 형태인 블루스(Blues)를 부르며 노동의 어려움을 달랬다. 흑인의 장례 문화 또한 초기 재즈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금관악기를 활용한 ‘브라스 밴드(Brass Band)’를 구성해 장례식을 치렀다. 그들의 음악에선 블루스의 서정성과 1930년대 스윙재즈(Swing Jazz)의 경쾌함을 모두 엿볼 수 있다. 

#금(禁)을 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행된 금주법(禁酒法)은 재즈의 기초요소인 즉흥 독주, 스캣(Scat)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전쟁 후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자 미국은 지난 1920년 알코올 소비를 제한했다. 그 영향으로 술집에서 재즈를 연주하던 음악가들은 무대에 설 기회를 잃었다. 이들은 주류 밀매가 활성화됐던 시카고(Chicago)의 술집으로 옮겨가 고객 유치를 목표로 삼았다. 음악가들은 기존의 재즈 형식에 화려함을 가미하고자 즉흥 독주, 스캣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즉흥 독주와 스캣은 재즈를 이루는 기초적인 토대가 됐다.

#흥을 더하다
지난 1933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시행하면서 재즈는 전성기를 맞았다. 뉴딜정책으로 실업률이 줄고 경기가 회복되자 미국 사회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이에 흥겨운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 재즈가 성행했다. 재즈 음악가들은 당김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리듬감을 더했다. 당대 유행한 ‘빅 밴드(Big Band)’는 춤과 음악이 결합한 ‘스윙 재즈(Swing Jazz)’를 연주했다. 열 명 이상의 연주자로 구성된 해당 밴드는 쉽고 편안한 음악을 추구해 재즈의 상업화에 앞장섰다.

#‘골라 듣는 음악’이 되다
1940년대 이후엔 다양한 형태의 재즈를 찾는 이들이 늘며 장르가 나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삶의 여유를 찾은 미국인들은 부드러운 음악을 원했다. 이에 미국 서부지역에선 클래식 음악의 색채가 더해진 ‘쿨재즈(Cool Jazz)’가 등장했다. 즉흥성이 약해진 쿨재즈를 선호하지 않았던 음악가들은 ‘하드 밥(Hard Bop)’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 브라질에선 ‘삼바(Samba)’와 쿨 재즈가 결합한 ‘보사 노바(Bossa Nova)’가 인기를 끌었다. 같은 시기 연주자의 즉흥성을 대폭 높인 ‘프리재즈(Free Jazz)’가 출현했다. 1970년대 록이 미국의 주류 음악으로 대두되자 록과 재즈가 결합된 ‘퓨전재즈(Fusion Jazz)’가 나타나기도 했다.


흑인의 고뇌를 노래했던 재즈는 점차 확산돼 모든 사람의 희로애락을 연주하는 음악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재즈는 사람들이 원하는 형태로 변형되며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 앞으로도 재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함께 전달하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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