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따돌림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의 어머니가 가해자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글로 하는 사과도 다르지 않다. 받을 수 없는 사과는 오히려 더 큰 상처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며 쓰는 문서라는 반성문의 사전적 의미는 쇠퇴된지 오래다. 지난달 18일(일), tvN에 방송된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 있는 범죄 잡학사전 알쓸범잡’에선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의 사과문을 다뤘다. 영상 속 사과문은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의 문장들로 빼곡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와 같은 비겁한 문장은 피해자와 유족에게 전하는 사과라기보단 자기 변호에 가까웠다.

감형을 위한 가해자의 반성문은 피해자에게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들이 남발하는 형식적인 사과조차 피해자를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과는 형량을 결정하는 사법 관계자를 향한다. 사죄와 선처라는 상반된 단어들이 널부러진 반성문은 위선일 뿐이다. 이와 같은 위선은 피해자를 좌절하게 한다. 재판 과정에서도 피해자들이 소외되는 이유이다.

불법 성착취 영상을 제작, 판매한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은 재판부에 수많은 반성문을 제출했다. 재판 과정 중에 제출한 100장 넘는 반성문 속엔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는 전혀 없었다. 재판 후에 기자들 앞에 선 조 씨는 특정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사과했다. 그들의 사과가 자신의 범죄로 헤아릴 수 없을 상처를 입은 피해 당사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목적지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사과였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양형기준표상 감경요소엔 ‘진지한 반성’이 명시돼 있다. 가해자들에게 진지한 반성이란 어떤 의미일까. 매일같이 ‘존경하는 재판장님께’로 시작하는 반성문을 써내는 것, 피해자를 향해 지었던 비열한 웃음을 악어의 눈물로 감추려는 것. 이것을 반성이라 착각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란 사실에 암담해진다. 그들이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피해 당사자라는 상식적인 사실을 알아차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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