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토) 방영된 SBS 예능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에서 가수 ‘이달의 소녀’의 츄가 촬영 중 궂은 일이 많아 걱정되지 않냐는 질문에 대해 “K-장녀여서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첫째 딸이라는 점은 왜 궂은일도 잘 해낼 수 있는 근거가 될까? 한국 사회의 장녀들은 어떤 특징을 공유하고 있기에 ‘K-장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게 됐을까?


K-장녀에게 떠맡겨진 가정 내 돌봄
K-장녀란 한국(Korea)와 장녀의 합성어다. K-장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많은 한국 장녀가 ‘부모의 부재 시 다른 가족을 보호할 책임을 떠맡는다’ ‘주로 가족에게 의지하기보다 가족이 의지한다’ 등의 특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K-장녀라는 신조어는 가정에서 책임감을 강요받는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는 단어인 동시에 한국 사회가 장녀의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기도 하다.

K-장녀는 가족 내에서 과도한 책임감을 요구받는 경향이 있다. 장녀 여성의 고충을 담은 일본 소설 「장녀들」을 번역한 안지나 오키나와국제대학 일본문화학과 교수는 “한국 여성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가족 구성원을 잘 돌봐야 한다고 교육받는다”며 “이러한 교육 탓에 자신이 부모나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돌봐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장녀는 다른 형제자매보다 부모와의 교류가 잦다. 지난 201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공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18세 이상 성인 자녀를 둔 응답자 541명 중 36%가 가장 자주 접촉한 자녀는 장녀라고 응답했다. 또한 부모와 장녀 간 접촉이 증가하는 반면 부모와 장남 간 접촉은 줄고 있다. 공동 연구진이 당해 응답을 10년 전인 2006년 응답과 비교한 결과 가장 많이 접촉한 성인 자녀가 장녀라는 응답률이 30.6%에서 36%로 증가했다. 반면 장남이라는 응답은 38%에서 33.8%로, 차남 이하 아들이라는 응답은 17%에서 14.4%로 감소했다.


숙명 속의 ‘K-장녀’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경험을 공유하는 일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K-장녀란 신조어가 유행하며 한국 장녀가 일상에서 겪어온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는 한국 장녀가 K-장녀를 만드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서로 공감하고 논의하는 계기가 됐다. K-장녀는 우리 주변에도 존재한다. 본교에도 장녀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만 했던 학우들이 있다. 장녀의 숙명을 짊어지고 살아온 학우들의 사연을 들어보자. 

오윤하(경제 20) 학우
저는 남동생이 두 명인 장녀인데, 동생들과 같은 행동을 해도 늘 제게만 책임이 요구됐어요. 부모님은 제가 동생들과 놀 때 누나니까 양보하라고 말씀하셨고, 동생들과 음식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못 했을 때에도 저만 나무라셨죠. 이런 부분에 대한 서운함을 말씀드린 이후론 괜찮아졌지만, 장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예전부터 있어왔어요. 삼남매 중 장녀이신 제 어머니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셨는데도 무언의 압박 탓에 취업을 일찍 하셨어요.  반면 오남매 중 장남이신 큰아버지께선 가족의 지원 덕에 오남매 중 최고학력자세요. 요즘 K-장녀라는 용어가 주목받는 상황을 보면서 한국 사회에도 장녀에게만 희생이 강요되어선 안된다는 의식이 형성되고 있다고 느껴요.

위선빈(법 18) 학우
주변 어른들께 장녀인 제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동생들이 잘 따라온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전 네 명의 동생들이 있는데, 사회로부터 장녀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일이 많았어요. 학교 선생님들께선 ‘장녀니까 부모님 기대에 부응해야지’ ‘동생이 많으니 나중에 아이는 잘 키우겠네’ 등의 말씀을 하셨죠. 장녀는 일찍 철들어 동생에게 모범이 되고 가정의 기둥이 돼야만 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사회에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익명을 요구한 학우
한동안 가족들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왔어요. 장녀란 이유로 부모님은 늘 저에게 의지하시며 남동생을 챙길 것을 요구하셨죠. ‘맏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을 어머니께 직접 듣기도 했어요. 가족을 위해 마땅히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해온 시간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Youtube)에서 K-장녀란 표현을 처음 접하게 됐어요. 한국 장녀들에 대해 다룬 영상을 보며 부모님 간 갈등을 중재하려 나서고, 부모님 대신 동생을 돌봤던 일이 많은 여성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일이란 사실을 알았어요. 그날 이후 저는 스스로를 위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어요. 다른 K-장녀들에게도 가족이 아닌 본인의 행복을 최우선순위에 두자고 말해주고 싶어요.


대한민국에서 첫째 딸로 살아남는 법
K-장녀들의 고충을 주제로 제작된 콘텐츠는 그들의 정서 회복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예은의 편지>는 가족의 반대에도 연기자를 꿈꾸는 K-장녀의 삶을 그렸다. <예은의 편지>를 제작한 권아인 ‘인터브이(InterV)’ 미디어 담당자는 “현실의 K-장녀가 가진 상처의 치유를 돕고자 K-장녀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K-장녀끼리 비슷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함으로써 각자의 책임감을 내려둘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3일(목) 인터브이는 장녀로 살아왔거나 한국 장녀가 겪는 고충에 공감하는 이들이 온라인으로 모여 공통의 경험을 나누는 자리인 ‘K-장녀파티’를 마련했다. 김지현 인터브이 비지니스 담당자는 “K-장녀파티 당시 한국 장녀의 삶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이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응원을 보냈다”며 “K-장녀들이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 괜찮다는 용기를 얻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장녀들」의 *해제 일부이자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을 대표하는 문구다. 이 문구의 의미가 시사하듯, K-장녀를 단순히 개인의 일시적인 감정이나 한 가정 내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로만 취급해선 안 된다. K-장녀는 여성에게 강요된 희생의 역사가 반영된 표현이다. 한국 사회의 장녀들이 가정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K-장녀의 현실을 인지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책의 저자·내용·체재·출판 연월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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