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칼럼

지난주 두 명의 성소수자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상을 떴다. 비보를 듣고 사회적 타살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사회적 타살은 사회적 약자의 자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회적 맥락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두 고인이 극단적 선택을 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여성과 남성 둘로만 나뉜다고 보는 성별이분법에서 성소수자는 배제된다. 성별이분법에 따르면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고 다른 절반은 남성으로 구분되는 사실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성별이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가령 간성의 경우 성 염색체와 신체의 성징이 다르게 나타난다. 성 염색체가 여성의 염색체인 XX이지만 남성기를 가진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존재한다. 이처럼 신체적 성이 성 염색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성별이분법으론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의 성별을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면 당신은 이미 성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숱한 고민의 과정 거쳐야 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또한 그러한 고민을 통해 찾은 정체성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다른 형태라면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다수가 각자를 여성 혹은 남성 중 하나로 이해할 때, 자신이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고 느끼는 소수가 있다. 또 다른 소수는 자신의 신체는 여성이지만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여기거나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사회적 경계를 거부하는 성 정체성을 논바이너리(Non-binary), 성 정체성과 신체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 성 정체성을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지난주 세상을 뜬 두 사람 중 한 명은 트랜스젠더였으며 또 다른 한 명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였다. 그들은 각자의 삶에서 사회가 덮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더불어 자신과 비슷한 소수자들이 보다 쉽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등지고 오해도 차별도 없는 곳으로 떠난 두 사람을 추모한다. 또한 본교에 존재할 성소수자 학우들에도 깊은 애도를 전한다.

어느덧 3월이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고들 한다. 그러나 봄은 과연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왔는가.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는 아직도 겨울에 머물러 있다. 차별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가 없다면 무지개가 지닌 빛은 나날이 흐려질 뿐이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이육사는 말했다. 우리 사회의 무지개가 무사히 겨울을 나기 위해선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 줄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비록 이번의 슬픔이 너무나 무겁더라도,  함께 손 잡고 이 겨울을 버텨내자고 부탁하고 싶다. 부디 이번 봄엔 정의가 약자의 편이 돼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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