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_김민주(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등학교)
강에 반쯤 담긴 태양을 뒤로한 채 배에 몸을 실었어. 물살을 가르고 다가오는 안개가 네 몸을 감쌌어. 너는 그게 답답했는지 팔을 뻗어 내 엄지손가락을 붙잡더구나. 내 엄지손가락만 한 너의 작은 손을 보는 게 꿈만 같았지. 태어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처음 내딛는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토록 작은 네가 힘을 다해 나에게로 와주었으니, 이제 나는 너를 위해 또 다른 용기를 내어야겠지.
“우린 지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야”

너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그제야 손에서 힘을 뺐어. 네 얼굴에 물살 같은 눈웃음이 띄어졌지. 우리 곁에 다가오는 안개가 싫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어. 물살을 가르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 섬이 점점 멀어지며 작아져갔어.

내가 살아온 이 섬의 부족원은 모두 여자였어. 어떻게 해야 이 밀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화살 하나로 짐승의 숨통을 단번에 끊는지 자매들을 통해서 배웠지. 우리는 어느 부족들보다도 시도를 잘 알았고 그 속에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지켜나갔어. 강물 건너 남자 부족과 여자 부족이 만날 수 있는 날은 보름달이 뜰 때 뿐이었어. 서로 연을 맺어 결혼하게 되어도 각자의 부족에게 속해 떨어져 사는 것이 전통이었지. 자매들은 아이를 가지면 밤마다 불을 지피는 횟수가 늘어났어. 하늘을 향해 배 속의 아이가 여자아이기를 빌었지. 만약 남자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버리거나 90일 뒤 남자 부족에게 보내야 했으니까.

나는 남자아이를 낳은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날은 유난히 안개가 자욱했고 추장의 천막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린 날이었어. 그 울음은 분명 화살이 관통한 짐승의 울부짖음이었어. 나는 슬그머니 천막 속을 살펴보았어. 거기엔 내 친구 뚜가 있었지. 남자아이를 품에 나고 울부짖는 뚜에.
“전통을 지켜라. 해가 뜨면 저 아이는 떠나야 한다”

추장은 그 한 마디로 모든 말들을 묵살시켰고 뚜는 아이를 품에 안고 강물에 몸을 던졌어. 아이를 보내는 것도, 전통을 어기는 것도 다 무서웠기 때문이었지.

뚜가 죽었는데도 부족들은 달라지는 게 없었어. 추장은 여자들만 사는 이 세상의 전통을 누구도 깨뜨릴 수 없다고 말했지. 달빛에 그늘진 추장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어. 뚜와 비슷한 시기에 너를 낳았던 나는 내게 곧 다가올 운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웠어. 추장은 손을 들어 올려 내 가슴팍을 찌르며 말했어.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길 바란다. 아이를 보내고 빨리 돌아오너라”

가슴팍이 화살촉에 베인 것처럼 따가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너를 버릴 수 없어 남자 부족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했지. 추장의 지시에 너와 나는 배에 올라탔어. 안갯속에 감쳐져 있던 강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거센 강물 아래로 어깨가 움츠러든 여인의 모습이 비쳤어. 뚜가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는 생각을 하니 뒤늦게 슬픔이 몰려왔어. 나를 배웅하던 자매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전통을 지키는 길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믿음은 변함이 없어보였어.

생명이라는 게 참 신기하더라. 짙은 쌍꺼풀과 두툼한 콧방울에 낮은 콧대까지, 어둠에서도 나를 똑 빼닮은 네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어.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순간 넋을 놓고 보기도 했었지. 너는 내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게 없는 것도 가지고 있었어. 어떤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맑은 눈동자. 나는 그게 삶의 가치라고 느꼈던 것 같아.

‘전통을 지켜라’

순간 뚜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말이 떠올랐어. 과연 전통은 인간의 존엄성보다 높은 곳에 있는 걸까? 인간이 없다면 전통은 무슨 소용일까? 이 섬은 전통으로 아름답기도 했지만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어. 물론 세상은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아.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름답기는커녕 더 고되고 힘들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우리가 탄 이 배가 아무리 수많은 안개가 앞을 가로막아도 헤쳐 뭍에 도착하듯 우리도 이 길을 헤쳐 나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거야. 그래서 나는 다시 배에 몸을 실을 거야. 너를 놓아주려는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야.
남자 부족이 보였어. 이내 물살을 가르던 배가 뭍에 도착할 즈음 나는 뱃머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어 노를 저었어.

“지금 뭐하는 거냐? 전통을 어기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화살촉 같은 눈초리를 치켜세운 남자 부족의 추장이 별안간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지. 내 부족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한 때서야 마음의 결심을 나는 말할 수가 있었단다.

“아닙니다. 나는 전통을 어기는 게 아니에요. 나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 아이가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을 말입니다”

강의 물결 사이로 아기를 두 팔로 안은 여인이 비춰 보였어. 아이를 갖기엔 앳돼 보이고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물살만큼 강인한 눈동자를 가진 엄마였지. 그 모습은 뚜도 부장도 아닌, 바로 나였어.

나는 노를 저었어. 너는 내 팔의 움직임을 물결로 안으며 깊고 고요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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