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일(금) 수학 학습의 인지·정서적 과정을 연구하는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IGPME)에 아시아 여성 최초 회장이 취임했다.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권 교수는 국제 수학교육계와 국내 과학기술계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실력과 의지를 증명해야 했던 수많은 경험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에서 세계 수학교육의 중심에 선 리더가 되기까지 권 교수가 개척해 온 길을 돌아봤다.
수학이 삶이 되기까지
초등학교 시절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추상적 개념을 기호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수학의 함축성에 매력을 느꼈다. 복잡한 문제를 간결한 논리로 풀어낼 때의 쾌감이 수학의 매력을 깨닫게 했다. 그는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리고 긴장감 속에서 해답을 찾아내던 순간이 저를 몰입하게 만들었어요”라고 얘기했다. 안동에서 서울로 상경한 권 교수에게 수학은 더 이상 단순한 학문이 아닌 그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권 교수는 “새로운 학교에서 손을 떨면서도 교실 앞에 나가 문제를 풀었어요”라며 “수학을 잘한다는 소문 덕에 친구가 생겼죠”라고 회상했다. 그는 낯선 환경에서 수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생긴 효과적인 수학교육 방법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스레 권 교수가 수학교육을 전공한 배경이 됐다.
수학교육을 전공하며 학문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석·박사 과정에서 순수 수학을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좋은 교사가 되려면 지식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학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수학교육 연구에 도움이 됐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는 박사과정에서 다변수 복소해석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다변수 복소해석학은 두 개 이상의 복소수 변수를 갖는 함수의 미적분과 관련된 성질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이다. 권 교수는 “제 연구 분야는 인생과 유사해요”라며 “작은 선택이 전체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과정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건 정말 흥미진진하죠”라고 말했다.
박사 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향한 그는 유학길에서 인생의 궤도를 바꾸는 경험을 마주했다. 권 교수가 직면한 건 우상으로 삼을만한 인물의 부재와 교육 방식의 한계라는 현실이었다. 그는 “프린스턴대(Princeton University)에서 열린 수학 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여성 강연자가 한 명뿐이었어요”라며 “수학을 공부하는 여학생이 드물단 건 제게 롤모델이 없단 뜻이었죠”라고 얘기했다. 창의적 질문을 던지고 독창적인 논문을 쓰는 데 어려움을 느낀 권 교수는 지금껏 받아온 교육 방식의 구조적 한계를 깨닫기도 했다. 그는 지도교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사 논문 심사 다음 날 수학교육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이는 권 교수가 수학 분야에서 여성이 소수인 이유를 고민하고 창의성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연구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정답을 뒤집고 세계를 이끌다
정답 암기식 수업에 의문을 품은 그는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학생이 중심이 되는 ‘플립드 러닝(Flipped Learning)’ 교육 방식을 도입했다. 기존과 정반대로 학생들이 집에서 동영상 강의로 기본 개념을 먼저 학습하고 강의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다. 권 교수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다 보니 당황하는 학생들도 많았어요”라며 “생각과 토론을 해야 하니까 수업을 힘들어했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분방정식 강의에선 실생활 시스템 분석을, 각종 수의 성질을 다루는 정수론 강의에선 새로운 정리 발견을 유도했다. 권 교수는 “좋은 교육은 학생을 질문의 주체로 만들어야 하죠”라며 “정답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사고 과정 중심으로 바뀌어야 해요”라고 얘기했다.
국제 연구의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일은 그의 목표 중 하나다. 30년 이상을 한국 수학교육학계의 국제화에 힘쓰고 있는 권 교수는 2000년 제9차 세계 수학교육대회에 선정된 한국인 최초 초청 강연자이자 2001년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인이다. 2002년 국제 학술대회에 초청된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는 “서구 중심의 국제 수학교육학계에서 영역을 개척하기는 힘들었지만 보람이 커요”라고 얘기했다. 연구의 영향력을 높이려면 논문의 인용 횟수가 중요하다. 이에 권 교수는 국제 학술 대회를 통한 다양한 분야 전문가와의 교류를 강조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건 열린 마음과 상대 문화에 대한 존중이에요”라고 전했다.
수학교육 분야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세계수학교육심리학회에서 20여 년간 활동한 권 교수는 아시아 여성 최초로 회장에 선출돼 지난 8월 임기를 시작했다. 그는 60개국 이상의 회원들이 참가한 투표에서 다수의 지지로 당선됐다. 캠페인 영상을 제작하고 각국 회원들과 만나며 자신을 각인한 결과였다. 권 교수는 “학문적 논의를 넘어 현장 중심의 지속 가능한 수학교육 네트워크를 만들 예정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수학교육 연구의 기조에 다양성과 포용성을 온전히 반영하고자 한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 수학교육계의 차세대 학자들이 세계적인 학자로 성장하는 걸 돕고 싶어요”라며 “동시에 후속 세대 여성 연구자가 더 넓은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마련할 거예요”라고 얘기했다.
새로운 길을 여는 책임감
권 교수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서 학계의 구조적 한계와 오래된 조직의 관습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여성 과학기술인 단체의 협력 창구 역할을 한다. 그는 “과학기술계는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관행이 누적됐어요”라며 “많은 여성 연구자가 유리천장을 경험하고 있죠”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여성의 과학기술계 참여 확대뿐만 아니라 성별 평등 및 조직 문화 개선까지 아우르고자 한다. 그는 “과학기술계의 지속 가능성과 혁신을 위한 필수적 투자예요”라며 “다양한 배경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연구하고 협력하면 더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죠”라고 얘기했다.
권 교수는 이공계 진출을 꿈꾸는 학우들에게 끊임없이 시도하라고 조언한다. 수학과 과학은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는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에요”라며 “실패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얘기했다. 특히 여성은 수학을 못한단 편견에 위축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한다. 권 교수는 “사회를 통해 증폭된 관념은 자신의 실제 능력과 무관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학우들이 자신의 속도와 방식으로 기회를 찾고 사람과 연결돼 꾸준히 성장하기를 원한다. 권 교수는 “한 사람의 성장이 사회의 미래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단 사실을 믿으면 좋겠어요”라고 전했다.
부정적 통념을 깨고 수학을 삶의 언어로 바꾸는 건 권 교수의 최종 목표다. 그는 수학을 포기한 이를 일컫는 ‘수포자’ 대신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수호자’를 제시한다. 권 교수는 “특정 현상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그게 통념이 돼요”라며 “부정적인 말을 대체할 긍정적인 단어가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수학에 대한 세상의 흥미를 높이고 후세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고자 한다. 권 교수의 다양한 발자취는 다음 세대와 여성 연구자의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하나의 사명감으로 이어진다. 그는 최초가 최후로 그쳐선 안 된다는 굳은 의지로 자신만의 여정을 계속해서 떠난다.
여러 면에서 처음이 된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자신의 성공보다 누군가를 위해 길을 터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길을 걷는다. 권 교수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로 1을 언급한 이유이다. 그는 연구 과정이란 끊임없는 질문과 발견의 여정이라고 말한다. 권 교수는 도전과 변화 앞에서 망설이지 말고 새로운 기회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라고 조언했다. 끊임없는 질문과 발견의 여정을 통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구자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