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김지혜 기자>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뒤 돌아보니 이룬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A 학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어떠한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우울하기도 하고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만 든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음을 털어놓은 A 학우는 최근 ‘무기력함’과 ‘우울함’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14일(목)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1,129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79.4%(896명)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어봤다고 답했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로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 직무거부 등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고갈된 상태에서 자주 나타난다.

치열하고 숨 가빴던 중간고사가 끝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숙명인도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지는 숙명인의 번아웃 증후군 경험 여부와 실태를 알아보고자 지난 3일(화)부터 4일(수)까지 학우 51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신뢰도 95%, 오차범위 ±1.8%p)

<그래픽=김지혜 기자>

◆ 몰두했던 일이 끝났을 때 느끼는 번아웃 증후군
본교 학우 중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해본 학우는 얼마나 될까. ‘무기력증과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해본 적 있냐’는 질문에 62.5%(320명)의 학우가 ‘있다’고 답했다. 학우 5명 중 3명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것이다.

학우들이 번아웃 증후군을 느끼는 시기는 다양했다. ‘언제 무기력, 자기혐오 등을 가장 크게 느끼냐’는 질문에 28.9%(105명)의 학우는 ‘시험, 과제 등 몰두했던 일이 끝나면 느낀다’고 답했다. 백희애(정치외교 14) 학우는 “몰두했던 시험이나 과제를 끝내고 나면 긴장이 풀리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며 “부족하고 아쉬웠던 부분이 생각날 땐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시험이 끝나면 무기력해진다는 김서영(미디어 13) 학우는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해방감도 들지만 동시에 허무함과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고 말했다. ‘개강 직전 등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느낀다’고 답한 학우가 20.1%(75명)로 뒤를 이었다.

무기력, 자기혐오 등을 특정 기간에만 느끼는 것이 아닌 하루의 시작과 끝, 매일 등 짧은 주기로 겪는 학우도 상당수로 나타났다. ‘매일 매 순간 느낀다’는 학우는 8.8%(32명), ‘하루가 끝날 때마다 느낀다’는 학우는 8.5%(31명),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느낀다’는 학우는 8%(29명)였다.

◆ 오래 지속되는 번아웃 증후군, 주시해야
학우들의 번아웃 증후군 증세는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번아웃 증후군이 얼마나 오래 지속됐냐’는 질문에 53%(195명)의 학우가 ‘1주일 이내’라고 답했다. ‘한 달 가량’ 지속됐다고 답한 학우는 21.2%(78명), ‘1개월 이상~6개월 이하’라고 답한 학우는 14.9%(55명)였다. 한편, 번아웃 증후군 증세가 ‘1년 이상’ 지속된 학우는 전체 응답자의 6%(22명)였다. ‘1년 이상’ 지속됐다고 답한 엄세희(한국어문 15) 학우는 “작년 5월부터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다”며 “학업과 봉사활동, 대외활동을 병행하고 있지만 기대했던 것에 비해 대학 생활에 큰 만족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해 지치고 무기력해졌다”고 말했다.

번아웃 증후군이 1년 이상 지속된 학우는 전체의 6%에 불과했지만, 무기력증의 지속이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하면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수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국내 우울증 환자는 2011년 약 53만 명에서 2015년 약 60만 명으로 4년 만에 12.4% 증가했다. 이는 무기력, 자기혐오 등이 단순히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됐음을 암시한다.

◆ 학우들 잠자는 것으로 번아웃 증후군 해소해
학우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번아웃 증후군을 해소하고 있었다. ‘번아웃 증후군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냐(복수응답 가능)’는 질문에 45.8%(170명)의 학우가 ‘잠을 잔다’고 답했다. 이다은(정치외교 14) 학우는 “잠을 잘 때는 해야 할 일로부터 압박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혼잡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잠을 청한다”고 말했다. 이어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학우는 32.3%(120명), ‘자연스럽게 해소됐다’는 학우는 31.3%(116명)였다. 

반면 ‘방법을 몰라 해소하지 못했다’는 학우도 11.1%(41명)로 적지 않았다. 익명의 한 학우는 “무기력증을 해소할 만한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며 “가족과 친한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고는 내가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고 말했다. 덧붙여 “심하게 무기력할 때는 왜 사는지 의문이 들 정도라 전문적인 상담을 받아볼까 고민을 한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한편, ‘병원 방문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답한 학우는 2.4%(9명)였다.

◆ 무기력, 현대인의 삶을 장악하다
『문제는 무기력이다』의 저자 박경숙 씨는 무기력을 ‘한 사람의 심적 에너지와 육체적 에너지가 이전보다 떨어졌을 때 느끼는 자신에 대한 자체 평가’라고 정의했다. 그는 비교적 뚜렷하게 외부로 드러나는 무기력이 있는 반면, 자신도 자각하기 힘든 ‘은밀한 무기력’도 있다고 설명했다. 은밀한 무기력에 빠진 이들은 스스로 무기력의 상태임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했더라도 가벼운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움직였으나 공허함을 느낀다. 열심히 살고는 있지만 자신의 삶이 빈껍데기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저자는 은밀한 무기력이 더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이러한 은밀한 무기력은 번아웃 증후군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무기력은 언제 어디에서 찾아올지 모르는 불확실성, 벗어난다 하더라도 재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위험하다. 

모든 것이 타버리고 재밖에 남지 않을 만큼 극심한 피로 상태인 ‘탈진’으로 진입한 우리 사회. 『문제는 무기력이다』와 함께 사람들의 의식·무의식 영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무기력과 번아웃 증후군의 원인과 해결 방법에 접근해 보자.

<그래픽=김지혜 기자>

 

 

 

 

 

 

 

 

 

◆ 내부로부터, 외부로부터 우리는 고통스럽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무기력을 야기하는 원인도 늘고 있다. 어린 시절 형성된 심리적 무기력이 개인의 무의식에 남는 경우도 있으며, 의존적이거나 강박적인 개개인의 성격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로서 무기력은 내부보다는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저자는 무기력증을 야기하는 원인 중 하나로 일상에서 겪는 ‘통제 불가능의 요소’를 지적했다. 열심히 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 고된 아르바이트로도 해결되지 않는 등록금과 생활비, 쉽사리 넘을 수 없는 높은 취업의 벽 등을 경험한 이들은 자신의 노력과 행동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 좌절감을 느낀다. 위와 같은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은 개인의 자존감을 앗아가고 무력하게 만든다.

승자만을 중시하는 ‘무한경쟁’의 현대 사회 역시 원인이다. 모든 것을 결과로 평가하는 사회의 시스템은 개인을 조직에 종속시켰다. 오로지 능력과 성과만으로 개인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회는 ‘해도 안 되더라’는 무기력을 양산하기 쉽다. 치솟는 등록금, 떨어지는 임금, 늘어만 가는 실업률 앞에서 청년들은 무기력에 빠지게 됐다.

경쟁은 과도한 ‘슈퍼맨(또는 슈퍼우먼) 증후군’을 양산하기도 한다. 이는 직장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해 내려는 강박 속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증상이다.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성취가 따르지 않았을 때 받는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인한 피로는 탈진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사람들은 무기력함을 느낀다.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다 
무기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저자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 전환’을 매 순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첫째는 ‘내재 동기’를 강화하는 것이다. 내재 동기란 마음속에 내재된 자신만의 동기로 보수나 평가보다 강하게 기능한다. 사람은 내재 동기에 따라 일할 때 더욱 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재 동기를 찾는 과정 없이 여기저기에 손을 대는 일은 개인을 지치게 할 뿐이다.

둘째는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즉, ‘인지’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무기력을 양산하는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인식은 어릴 적 경험 혹은 외부의 지속적 억압 및 무시 속에서 형성된다. 저자는 인지 왜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유능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유능감이란 자신에게는 어떤 일을 잘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과 자기 비하, 우울 등과 달리 유능감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없이도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감정인 ‘자존감’ 형성을 돕는다.

셋째는 ‘감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나침반 삼아 삶을 이끌어 나간다. 그만큼 감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다. 극심한 무기력을 겪는 이들은 슬프고 불쾌한 상태의 지속을 경험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타인, 상황에 분노함과 동시에 흔들리는 자신에게도 분노하고 실망한다. 그러나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쟁심, 질투심보다는 자신만의 유능감을 갖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흔들리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아 성찰, 창의성, 사회성, 감정 처리 등을 지원하는 두뇌 회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는 상태, 즉 휴식 상태에서 더욱 활발하게 작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뇌 과학의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휴식을 ‘사치’ 혹은 ‘게으름’이라고 인식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이기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포화 상태에 치닫고 있다. 삶의 편리와 풍요를 목적으로 탄생한 모든 도구는 도리어 우리를 극심한 피로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일만 알고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의 창시자 ‘헨리 포드(Henry Ford)’의 말이다. 휴식은 중요하다. 삶이 무기력하고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가치를 찾지 못해 괴롭다면 때로는 좀처럼 손에서 떨어질 일 없던 스마트폰도, 성적과 취업 등에 대한 압박도 잊은 채 휴식을 취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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