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예술고등학교 전혜림

깃발

우리 엄마는 '미세스 코리아'다. 엄마의 런웨이는 경복궁. 빳빳하게 풀 먹인 한복을 입고, 엄마는 날마다 궁 안을 누빈다. 두 손에는 태극기와 낯선 타국의 국기가 그려진 깃발이 나누어 들려있다. 엄마가 그 깃발을 높이 흔들때면 갈색눈과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들이 앞다투어 엄마를 찾아온다. 그들 앞에서 '트라디셔널 팔리스' 경복궁을 소개하는 엄마. 사람들은 그런 우리 엄마를 '미세스 코리아'라고 부른다.
'한국을 대표할 자랑스러운 얼굴을 모집합니다' 처음에 엄마가 가이드 모집 포스터를 내 눈앞에 내밀었을 때, 나는 이 홍보문구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예전 영화에서 보았던 외계인 E.T처럼 불룩 튀어나온 엄마의 배와 달의 크레이터만큼 울퉁불퉁 패인 엄마의 피부를 떠올렸다. 비록 엄마가 영어를 좀 한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얼굴'이 되기에는 솔직히 부족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결국 경복궁 가이드 모집에 지원서를 냈다. 2차에 한복까지 챙겨 입고가서 면접을 봤다는 엄마는 다른 지원자들보다 한참 모자랐던 1차 서류성적을 가볍게 역전하고 최종 선발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유난이라며 눈쌀을 찌푸렸지만 엄마는 이런 게 바로 자신감이라며 몹시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고는 아직까지도 한복을 차려입고 가이드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단축수업을 한 날에 엄마를 보러 경복궁을 찾은 적이 있었다. 꼭 한 번 일하는 걸 보러오라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찾아간 것이었다. 사실 전에도 엄마가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눈 앞에서 마주한 엄마의 모습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신 충격적이었다. 새파란 저고리에 진한 갈색 치마를 입은 엄마는 딱딱한 한국식 영어발음으로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엄마가 가이드를 맡은 그룹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외국인들까지도 발걸음을 멈춰 엄마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원래는 엄마가 느껴야 할 부끄러움까지 모두 내가 대신 겪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이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갔다. 태극기와 낯선 국기가 새겨진 깃발을 든 엄마의 양손을 쉴새없이 위아래, 양 옆으로 움직였다. 더불어 깃발도 정신없이 펄럭였다. 그 모습은 마치 혼자서 청기백기 게임을 하는 광대 같았다.

그 날 가이드가 끝나고 함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왠지 모를 뿌듯한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어때? 엄마 잘 하지?"
내게 묻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상해있었다. 웃을 때까지 날까롭게 쉰 소리가 났다. 그 목소리에 괜히 아까 보았던 엄마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한복까지 입고서, 좀 조용히 얌전하게 설명할 수 없어?"
"그럼 그 사람들이 알아듣니? 크게 크게 해야 기억에도 오래 남고 자기 나라 돌아가서도 뭘 보고 뭘 들었는지 전해주지."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좋은 소리를 해보려고 했지만, 깃발 두 개를 이리저리 뻗으며 우스꽝스러운 설명을 하던 엄마가 자꾸만 생각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때, 가만히 내 표정을 살피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만 이게 비행기를 타는 일이라고 생각해." 무슨 말인가, 싶어 바라보는 내게 엄마는 내가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감도 생소한 '엄마의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 젊은 엄마는 항공사 승무원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목에 스카프를 하고 검은 가방을 끄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고, 그리고 새처럼 날아 온갖 나라의 국경을 지나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없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때는 엄마 예뻤어. 사람들이 그, 오드리 햅번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큰 꿈을 꾸는 중에 아빠를 만난 것이었다. 오드리 햅번보다도 엄마를 더 미인으로 생각하고, 흠 잡을 데 없이 아껴주는 아빠를 보고, 엄마는 꿈을 조금 미뤄두고 천천히 이뤄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하지만 신혼 생활에 갑자기 내가 생겼고, 그래서 엄마의 꿈은 자꾸자꾸 미뤄지기만 하다가 이룰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양 손에 깃발을 들고 있으면 꼭 내가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지나는 것 같아. 그래서 엄만 이 일이 너무 재밌다."
그 날 이후, 나는 다시 찾을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경복궁에 다시 찾았다. 어쩐지 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이드를 보고 좋은 말을 못해준 것도, 오랫동안 꿈을 미루게만 했던 것도 미안했다. 나는 천천히 경복궁을 걷다가 멀리서도 선명한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는 전과 같은 모습으로 양 손에 국기 깃발을 들고 궁의 이곳저곳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미세스 코리아."
엄마의 설명을 듣던 외국인이 손을 들고 무언가를 질문했다. 질문을 받는 엄마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했다. 엄마는 두 손에 꼭 쥔 깃발을 위아래로 흩날리며 그 외국인의 질문에 답을 했다. 깃발 끝으로 연못을 가리켰다가, 정자의 처마를 가리켰다가 했다. 엄마의 설명을 따라 나풀거리는 두 깃발이 꼭 날개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루지 못한 꿈 대신 엄마에게 생긴 작은 날개. 날개를 단 미세스 코리아는 그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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