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예술고등학교 이가영

거대한 틀

아, 비눗방울처럼만 살고싶다. 길거리에서 팔던 이천원짜리 비눗방울을 후후 불며, 나는 지금껏 수십 번 반복했던 말을 또 한 번 중얼거렸다. 동그랗고 투명한 비눗방울들이 햇빛을 반짝반짝 반사시키며 두둥실 떠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비눗방울보다 고집이 센 것은 또 없다. 틀이 별 모양이든 어떻든 나오는 것은 죄다 동그란 방울들이기 때문이다. 남이사 뭐라고 하든 저 하고싶은 대로 순풍순풍 둥글게 태어나는 것들이 퍽 부럽기만 했다. 어린이 날을 맞아 작은 행사를 진행한다더니, 중앙공원은 이미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였다. 나는 여러 부스들이 늦어선 대공연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벤치에 앉아 기껏 불어낸 비눗방울이나 툭툭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런 날에 학원을 보내는 엄마는 뭐람. 학원이 쉰다고 하면 그냥 쉬는 거지, 굳이 저번 시험을 들먹이며 선생님을 쪼았어야 하나, 투덜거리며 다시 별 모양 틀에 입김을 훅 불어 비눗방울들을 날려보냈다. 방울들 사이로 저 멀리 '마녀의 과자집'이라 쓰인 천막 아래서 거대한 과자틀을 들고있는 엄마가 얼핏 보였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어린이 날이었고, 공휴일이었고, 따라서 학원도 쉬는 날이었으니 분명 친구를 만났건 엄마를 도왔건 무언가를 하고 있었어야 옳았다. 아마 어제 온갖 잡다구니들이 굴러다니는 가방 안에서 케케묵은 성적표만 나오지 않았어도 분명 지금쯤 나는 오월 햇살을 만끽하며 삶의 즐거움에 대해 논하고 있엇을 것이었다. 물론 후회한다고 해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지만.

엄마는 유독 내게 엄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성적'에 엄했다. 일등까지는 아니어도 항상 상위권에 속해있길 바랐고, 순간 잘못해 중위권으로 떨어지는 날에는 말도 못할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엄마는 내게 항상 기죽지 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나보다는 엄마가 더욱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작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빠를 엄마는 지독히도 신경썼다. 아빠없는 애처럼 보이지 말라며 내 옷주름 하나도 판판히 펴주었고, 아빠가 없으니 되려 더욱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며 하루를 바쁘게 살았다. 내 공부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빠가 없어도 나는 성공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여하간 내 성적표를 본 엄마는 곳곳에 찍힌 '4등급'을 보고는 한참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나 꿈이 생겼어. 공부는 내 길이 아닌 것 같아,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엄마의 서슬퍼런 눈에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는 없었다. 엄마는 치대고 있던 반죽을 쾅, 하고 내려놓았다. 정말 실망이다. 나직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차라리 화를 내지 그렇게나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실망? 지금껏 나한테 기대한 게 공부빼고는 뭐 있는데? 난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해? 차라리 그 손에 들린 과자틀이나 반죽에 찍어내지 그래? 엄마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엄마 그런 거 잘 하잖아, 죄다 똑같은 과자 만들어내는 거."
뱉어내고 나서야 실수했단 것을 깨달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이 반죽만큼이나 허여멀겋게 질려있었다. 나는 뒤늦게 두 손바닥으로 합,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쏟아내버린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미...안, 작게 중얼거려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저 멀거니 반죽을 보고있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제낀 것이나 다름없었다. 엄마는 제빵사였다. 나름의 인정도 받아 작은 호텔에서 직접 디저트를 만들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의 꿈은 조금 더 컸다. 해외에 나가 더 배우고, 엄마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내는 것이 엄마가 하고싶은 일이었다. 아마 엄마에게 내가 생기지만 않았어도 엄마는 충분히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생겨버린 생명을 지울만큼 엄마는 독하질 못했고, 결국 엄마는 아기포대를 둘둘 감은 채로 작은 동네 빵집이나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꿈이 좌절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마 엄마는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마 엄마는 차라리 그런 좌절마저 겪지 않고 내가 안전한 길만을 걸을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런 거대한 틀을 만들어두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삐죽삐죽 모가 난 내가 현실에 맞춰 깎여나가는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차라리 처음부터 나를 가장 '남들처럼' 틀에 맞도록.

멀리서도 사람들이 엄마의 천막 근처에 바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겠다고 직접 30cm짜리 과자틀을 맞춤제작한 보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힘든지 땀을 비처럼 흘리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가 걱정한대로 별 시덥잖은 이유들로 엄마가 맛봤던 좌절을 따라 느끼게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저렇게 웃을 수만 있으면 그까짓 현실의 틀들이 무슨 걱정이랴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조금 빠져나가 한산해진 엄마 앞으로 걸어갔다. 다 똑같은 건 재미없잖아, 엄마. 천막 벽에 기대져있던 과자틀을 집어든 채 씨익 웃어보였다. 물이 담겨있던 큰 대접같은 그릇을 비우고 들고있던 비눗방울액을 들이부었다. 과자틀을 담갔다 꺼내들며 크게 휘둘렀다. 거대한 과자틀에서 거대한 비눗방울 하나가 솟아나와 몽실몽실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거대한 틀이든 비눗방울처럼 빠져나갈게. 너무...걱정하지마.
미안하다는 말대신 머쓱하게 건넨 말에 엄마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얼굴처럼 둥근 비눗방울이 넘실넘실 바람을 탔다. 항상 똑같은 모양만 찍어내던 거대한 틀에서 스며나온 동그란 방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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