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10일(목) 한강 작가가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10월15일(화) 오후4시 기준 국내 3대 서점인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에서 판매된 한강 작가의 책은 약 105만 부로, 5일 동안 153억원의 판매 수익을 달성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이후 전국적으로 책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일명 ‘한강효과’에 맞물려 책을 읽는 행위가 매력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MZ세대는 책을 꾸미고, 본인의 언어로 책 내용을 정리하는 등 색다른 방법으로 독서를 즐기고 있다. 그들의 독서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독서하는 나, 조금 멋있을지도
MZ세대를 강타한 ‘텍스트힙(Text Hip)’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지다를 뜻하는 ‘힙하다’의 합성어로, 독서를 개성 있고 세련되게 보는 현상이다. 2030세대는 단순히 글을 읽는 딱딱한 독서에서 벗어나 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본인만의 개성을 표현한다. ‘독서는 멋지다’란 인식이 퍼지자 MZ세대의 독서율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약 2권의 책을 읽는 이승은(컴퓨터과학 23) 학우는 “등하굣길에 오디오북을 듣거나 틈틈이 휴대폰으로 전자책을 읽는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이 1년 동안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을 뜻하는 연간독서율은 43%로, 그중 20대의 독서율이 74.5%로 가장 높았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독서를 하는 행위가 쉽지 않기 때문에 멋진 행위로 보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온라인으로 책을 읽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 전자책 구독 플랫폼인 밀리의 서재의 누적 가입자는 2022년 약 532만명에서 지난해 10월 약 835만명을 달성했다.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한 청년들은 독서가 주는 평온하고 조용한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 MZ세대는 독서로 디지털 기기의 사용을 제한해 디지털 피로를 낮추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이은서(화공생명 24) 학우는 “독서를 할 땐 디지털 기기의 전원을 꺼놓는다”며 “온전히 책에 집중할 때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최근엔 독서와 자극을 뜻하는 도파민(Dopamine)의 합성어인 ‘독파민’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이승은 학우는 “도파민을 채우려고 책을 읽는다”며 “책을 읽다 감정이 북받치면 동네 한 바퀴를 돌기도 한다”고 독서의 짜릿함을 설명했다. 책 읽기의 재미를 뜻하는 독파민은 독서의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을 나타낸다. 이은서 학우는 “책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며 “작품 속 세계를 마주할 때 느껴지는 희열과 책을 읽을수록 달라지는 해석이 그 묘미다”고 설명했다.
MZ세대가 책을 읽은 후 SNS에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며 독서는 소통과 자기표현의 수단이 됐다. 틱톡(Tiktok)의 독자 커뮤니티인 ‘북톡(Booktok)’에선 좋아하는 작가를 추천하거나 서평을 나누며 교류한다. 2월 기준 #BookTok 태그가 포함된 틱톡 게시물은 약 4590만개다. MZ세대는 본인만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책을 읽은 후 다른 독자에게 적극 추천하는 ‘책 영업’을 한다. 책을 읽은 뒤 후기를 작성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독자를 모으는 것이다. 2월 20일(목) 예스24 독서 커뮤니티 ‘사락’의 분석에 따르면 2023년 약 3만건이었던 1020세대의 도서 리뷰 수는 지난해 52% 증가한 약 4만4000건을 달성했다. 이승은 학우는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알리고 싶어 블로그에 공유한다”며 “다른 사람들도 책을 읽고 자신과 같은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책도 개성있게 읽어야죠
자신의 기호에 따라 책을 장식하고 꾸미는 ‘책꾸’ 놀이가 인기를 얻고 있다. 책 표지에 브로치를 붙이거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인덱스 스티커나 책갈피를 이용해 표시한다. 과거 사생활 보호를 위해 사용됐던 북커버(Book Cover)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도구로도 사용된다. 신윤이(법 22) 학우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때 표지를 가리기 위해 북커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며 “가죽과 면으로 된 북커버가 있지만 촉감과 디자인이 뛰어난 면 북커버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책꾸 인기와 함께 독서 용품의 판매도 급증했다. 지난해 1월 1일(월)부터 올해 1월 15일(수)까지 예스24의 독서 용품 판매량은 전년 대비 북커버 195.1%, 인덱스·라벨 스티커 93.3%, 북마크·책갈피 42.8% 증가했다. 출판사 또한 유행에 맞춰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는 다양한 책꾸 기획 상품을 내놓았다. 지난해 9월 출판사 문학동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스티커와 동봉한 책꾸 에디션을 출시했다.
단순한 독서를 넘어 쓰는 행위를 매력적으로 여기는 ‘라이팅 힙(Writing Hip)’도 주목받는다. 스마트폰과 키보드가 익숙한 MZ세대에게 손글씨는 새로운 재미로 다가온다. 이승은 학우는 “주로 책에서 인상 깊거나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필사한다”며 “독서 경험을 기록하고 추억도 할 수 있어 즐긴다” 고 설명했다. 과거 텍스트 마니아를 필두로 시와 소설을 위주로 진행됐던 필사는 철학, 법률, 자기계발 등으로 분야가 확장됐다. 예스24에 따르면 올해 1월 헌법 조문을 따라 쓰는 「헌법필사」는 지난달 대비 판매량이 1036% 급상승했다. 라이팅 힙 열풍에 문구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온라인 프리미엄 편집숍 29CM에 따르면 1월1일(수)부터 2월12일(수)까지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은 전년 대비 75% 증가했다.
책을 읽은 후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는 독서모임도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개인 독서 후 독서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MZ세대에겐 하나의 놀이로 자리잡았다. 독서모임 서비스 출시 6개월 만에 1600개가 넘는 모임이 개설됐던 ‘사락’에선 올해 1월 전년 대비 10배 증가한 502개의 모임이 새로 개설됐다. 이은서 학우는 “읽은 책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나 해석이 듣고 싶어 독서모임을 시작했다”며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작가의 이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재밌다”고 말했다. 독서모임의 주제와 진행 방식은 구성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운영된다. 지난달 24일(월) 기준 ‘사락’에선 ‘자유롭게 읽는 모임’ ‘하루에 10p 읽는 모임’ 등 자유 주제로 운영되는 모임이 전체의 25.2%를 차지했다.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책방 투어를 가기도 한다. 독특한 책방이나 독립서점에 방문해 책을 구경하는 것이 MZ세대에겐 감각적인 트렌드로 여겨진다.
독서 문화를 꽃피우려면
일각에선 책을 소비하는 방식이 ‘읽는’ 것보다 ‘보여주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점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독서를 SNS에 자랑하기 위한 일종의 장식이나 소품처럼 활용한다는 비판이다. 이승은 학우는 “책을 구매한 채 방치하거나 빌린 책을 읽지 않고 반납하는 사람을 두고 ‘책 산책시킨다’란 우스갯 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텍스트힙 문화는 MZ세대가 독서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김 평론가는 “텍스트힙 트렌드를 통해 100명 중 한두 명이라도 책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좋은 방향이라 생각한다”며 “청년기에 겪는 긍정적인 독서 경험이 평생의 독서 습관을 형성한다”고 얘기했다.
텍스트힙 열풍을 넘어 독서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선 문학인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 독서 인구를 늘리려면 독자를 사로잡을 책이 필요하다. 김 평론가는 “젊은 세대는 손에 들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언제든지 구매한다”며 “읽고 싶은 책을 만들기 위해선 작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데 지원책이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학인 20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1 문학실태’에 따르면 문학인의 86%는 문학 활동을 통해 100만원 이하의 수입을 얻고 있었다. 작가가 작품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온전히 창작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절실하다. 김 평론가는 “작가가 등단을 하더라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원고료를 높이거나 작가가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자체와 출판계는 텍스트힙 트렌드에 맞춰 독서 인구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울도서관은 4월부터 ‘독서는 힙하다’는 주제로 MZ세대 1만명을 대상으로 한 독서모임 ‘힙독클럽’(Hip+讀+Club)을 운영할 계획이다. 오지은 서울도서관장은 “독서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며 “힙독클럽 회원은 서울국제정원박람회와 같은 이색적인 야외 공간에서 독서에 몰입하는 활동과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판계 역시 MZ세대를 겨냥한 도서 프로모션을 준비 중이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국내 최초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도 출판업계의 도서 판매와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오는 4월부터 서울책보고엔 서점이나 출판사가 팝업스토어 형식으로 입점할 예정이다.
19세기 미국의 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는 ‘오늘의 독서가 내일의 리더를 만든다’고 말했다. 읽는 여성은 생각하는 여성이 되고, 생각하는 여성은 변화의 주체가 된다. 세상을 바꿀 부드러운 리더가 될 숙명인에게 독서는 필수적이다. 자극이 일상화된 지금, 독서가 주는 고요한 매력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