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화)은 유엔(UN, United Nations)이 정한 ‘국제 돌봄과 지원의 날’이었다. 돌봄노동은 우리 삶을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지만 ‘여성만의 것’ ‘여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불리며 저평가된다. 돌봄노동이 정말 여성의 전유물일까. 숙련이 요구되지 않는 단순노동일 뿐일까. 익숙함이란 그림자에 가려진 돌봄노동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자.
돌봄, 제대로 인식하고 계십니까
돌봄노동은 사람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도록 돕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다. 설거지, 요리, 육아 등 가정에서 무급으로 이뤄지는 가사노동뿐 아니라 요양, 보육, 교육의 영역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급 노동도 이에 해당한다. 돌봄노동은 관계적인 활동과 비관계적인 활동으로도 구분된다. 백경흔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는 “노인을 보살피거나 아이를 양육하는 관계적인 일과 빨래나 청소와 같은 비관계적인 일로 돌봄노동을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이 돌봄노동을 도맡아 하고 있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남성의 3.4배다.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3시간13분이지만 남성은 56분에 불과하다. 27년 차 주부 정성은(54) 씨는 “집안일의 대부분은 아내가 하고 남편은 일부분 도와주는 것에 그친다”며 “육체적, 정신적인 부담이 여성에게 치우쳤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한 경제적 가치 역시 여성이 남성보다 높게 책정된다. 통계청이 지난해 6월 발표한 ‘무급 가사노동 평가액의 세대 간 배분 심층분석’을 살펴보면, 2019년 여성이 생산한 가사노동 서비스는 356조원으로 남성보다 2.6배 많다. 유급으로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성비도 여성이 월등히 높다. 2022년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돌봄직 종사자의 92%가 여성이다.
돌봄노동은 숙련된 지식 없이도 수행할 수 있는 단순한 일로 경시된다. 이러한 평가절하는 돌봄노동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는단 점에서 기인한다. 25년 차 주부 정정숙(53) 씨는 “가족 구성원이 가사노동의 대가를 모르고 엄마의 노고를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박연빈(약학 24) 학우도 “돌봄노동은 집에서 이뤄져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업으로서 돌봄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22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1만270명 대상으로 국민인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돌봄 직종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지 묻는 질문에 ‘높다’와 ‘매우 높다’를 답변한 비율은 가사도우미 7.9%(811명), 간병인 9.4%(965명), 요양보호사 11.2%(1150명)로 돌봄 직종 모두 낮았다. 전현욱 전국돌봄서비스노동조합 사무처장은 “이용자가 요양보호사를 ‘어이’ ‘아줌마’로 부르며 갑질하는 문제가 있다”며 “돌봄노동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요양보호사는 여전히 최저임금을 받는다”고 말했다. 노동자 자신조차 돌봄노동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한다. 백 박사는 “기혼 여성이란 자격만으로 취직하다 보니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업무가 대단하지 않은 일이라고 내면화한다”고 말했다.
'공짜' 노동 취급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단 고정관념으로 돌봄노동의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됐다. 성별분업의 통념은 돌봄노동의 성 편향성을 강화한다. 양난주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돌봄을 전담하는 성 역할의 고착화 때문에 돌봄노동은 여성에 의해 무상으로 존재해 왔다”고 지적했다. 부부가 가사노동을 분담해도 남편은 자녀를 돌보는 ‘양육적 돌봄노동’에만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양육적 돌봄은 비양육적 돌봄보다 돌봄노동에서 차지하는 시간이 적다.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 평일 성인 남녀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가정관리 1시간36분, 가족 돌보기는 24분이다. 백 박사는 “돌봄노동에서도 위계가 낮고 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은 주로 여성이 한다”고 말했다.
돌봄노동이 경시되는 이유는 사적 영역에서 당연히 존재해 온 일이기 때문이다. 집이란 소외된 공간에서 노동의 가치는 비가시화됐다. 양 교수는 “돌봄노동을 애써 구하지 않아도 전업주부인 여성의 수행으로 언제든지 무상으로 제공돼 왔단 점이 저평가의 원인이다”고 설명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영향으로 돌봄노동의 가치가 인정되지 못했단 분석도 제기된다.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가정주부화는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됐다. 백 박사는 “돌봄노동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자본주의의 특성과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려는 가부장제가 결합해 돌봄에 대한 책임이 여성에게 치우쳤다”고 말했다. 저평가된 돌봄노동의 인식은 실제 노동 현장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길나현(법 23) 학우는 “우리나라에 육체노동을 깎아내리는 인식이 고착화돼 있어 돌봄노동을 낮게 평가하는 것 같다”며 “이러한 시선은 돌봄 종사자의 노동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안정한 고용으로 돌봄 종사자의 노동권이 침해되고 있다. 돌봄노동자는 갑자기 일자리를 잃어도 휴업수당을 받지 못한다. 주로 1년 단위로 단기계약을 맺어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전 사무처장은 “고용 불안정성으로 노동조합의 교섭이 어려워 처우 개선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돌봄직종의 임금 수준도 열악하다. 2022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에 따르면 돌봄·보건 서비스 노동자 월평균 임금은 153만원이다. 당시 최저임금 기준 월급인 191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낮은 임금체계로 돌봄노동자가 일자리에서 이탈하자 정부는 인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 도입 정책을 실시했다. 8월 6일(화)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 사업으로 필리핀 여성 100명이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한국은행은 3월 보고서를 발표하며 돌봄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 외국인 노동자를 저렴한 비용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드러냈다. 전 사무처장은 “저임금 체제가 유지된다면 외국인 노동자도 떠날 것이다”며 “해외 노동자의 도입이 돌봄 인력난의 근본적 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함께 보살피는 사회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돌봄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부부간 가사노동의 분담이 필요하다. 정성은 씨는 “돌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면 노동 분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 학우도 “성역할의 편견이 해소돼야 돌봄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급 돌봄노동도 여성의 전유물로 남아선 안 된다. 양 교수는 “현재 장기 요양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중년 여성에 편중돼 있다”며 “1인 가구가 증가하고 고령화가 진행되는 시대에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선 돌봄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노동엔 상당한 숙련 지식이 요구된단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가사노동을 위해선 일상적인 기본 지식과 함께 보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정정숙 씨는 “가사노동은 단순한 집안일만 하지 않고 가족 구성원의 건강 상태를 염두에 둬야 한다”며 “한 끼 식사를 준비하더라도 장보기부터 요리, 설거지까지 노동이 24시간 지속된다”고 말했다. 또한 가사노동은 단기간에 숙련되는 일이 아니다. 정성은 씨는 “가사는 1년 정도 반복해야 숙달되고 육아는 더 오랜 경험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직업으로서의 돌봄노동자가 되려면 인간의 특성을 이해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돌봄노동은 타인과 관계를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용자의 특성과 취약점을 파악해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전 사무처장은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므로 경험치와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돌봄노동자를 지원하는 정책 마련이 필요하다. 현재 돌봄노동자 관련 법률이 전무해 법적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 지난달 29일(화)엔 ‘국제 돌봄과 지원의 날’을 맞아 ‘돌봄노동자의 권리보장과 처우개선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됐다. 해당 법률안은 국가의 돌봄노동자 지원책 수립을 촉구하고, 최소 노동시간과 적정 임금 보장을 목적으로 한다. 전 사무처장은 “돌봄노동자의 표준 임금 가이드라인을 보장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돌봄서비스 시장 개입도 요구된다. 돌봄서비스는 주로 민간 기관의 위탁으로 제공돼 노동권 침해의 우려가 있다. 양 교수는 “정부가 먼저 돌봄서비스의 모범적인 공급자가 돼 고용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노동은 우리 삶을 지탱하고 가족을 보호하는 버팀목 같은 존재다. 돌봄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할 권리가 보장된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정정숙(53) 씨는 “양육은 자연스럽게 ‘엄마가 해야 하는 일’이 됐지만 모성애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며 “가사노동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성의 돌봄노동을 당연시하지 않고 남녀가 돌봄을 분담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참고문헌
김은지 외 6인. (2022). 젠더 관점의 사회적 돌봄 재편방안 연구 (I): 개인화 시대 돌봄정책 패러다임 전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백경흔. (2021). 무급 돌봄노동 비숙련 통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여성학, 37(4), 41-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