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예측에서 벗어나는 일을 피하려 한다. 필자와 비슷한 경향의 독자가 있을 것 같아 몇 가지를 말해보자면, 얼마 전 파마를 한 이후론 매일 아침 어디로 튈지 모르는 머리를 마주해야 했다. 이리저리 뻗치는 머리카락이 보기 싫어 아예 묶어버린 적도 많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다가 결국 뻗치는 부분을 다 잘라버렸다. 새로운 곡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는 곡만 닳도록 돌려 듣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귀에 예측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오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그림도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그릴 수 있는 수채화나 유화보단 정밀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리는 소묘를 선호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친한 이와 갈등이 생겼을 땐 할 말을 목차별로 정리해 대본을 만들어 둔다. 여러 번 다시 읽고 고쳐 쓴다.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대화의 흐름도 상상해 보며 준비한다. 그러나 정작 만나서 이야기할 때 대본대로 흘러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예상 밖을 벗어나는 상황에 취약하여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예측을 비껴간 것 중 필자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기나긴 입시였다.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집착적으로 한 가지 길만 생각하던 수험생은 실패했을 때의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되는 세계는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처음 입시에 실패한 해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스스로 만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2년을 더 애썼지만 결국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얻었다. 필자는 그제야 흘려보낸 시간과 희생된 것을 돌아보게 됐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이 믿는 대로 이뤄질 거란 착각 탓이다. 필자는 이 착각에 ‘치명적인 낙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전과는 달리 삶의 탄력성과 유연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 찾아낸 해결 방법은 이렇다. 울타리를 세우되, 울타리가 무너지면 그 밖의 것들에서 그냥 유영하는 것.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서 시나리오에 없던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구멍 나도록 돌려 듣는 노래도 처음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그 낯선 음악에 귀를 기울였기에 지금 사랑하는 곡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계인 같은 타인을 마주할 때면 경계하는 대신 교감과 소통을 시도하며 필자의 행성은 더욱 넓어졌다. ‘어떻게 이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됐을까’하는 감명 깊은 순간도 찾아온다. 불시착이라고 생각했던 전공에선 오래 전에 지워뒀던 꿈을 다시 그리고 있다. 매일 글을 쓰는 일상이 힘들지만 행복하다. 소중한 사람들과 잊지 못할 기억들이 하나둘 쌓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건 대본에 없었다고.

삶에서 제각각 다른 형태로 밀려오는 파도를 마주하는 적절한 자세는 무엇일까. 이것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경계하고 대비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떠다니는 곳은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는 잔잔한 바다가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을 휘두를 수 없다면, 예측 불가능하게 다가오는 우연의 파도 위에서 신나게 서핑해 보는 건 어떨까.


한국어문 24 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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