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말]
푸를 청에 봄 춘.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마저도 예쁜 단어 청춘靑春. 사전에선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젊은 나이로 정의되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정의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가장 푸르른 시기가 비슷하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가장 푸를지, 혹은 앞으로 더 환하게 피어날지조차 알 수 없다. 단순히 살아온 세월의 햇수만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마지막이라 이르기엔 저마다 지닌 이파리와 꽃봉오리와 뿌리들이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몸속의 물관에 다시는 푸른 기운이 흐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 순간은 얼마나 공허할지 이따금 상상해본다.
봄은 비록 낙화하는 벚꽃 한 잎에도 눈이 시려올 만큼 아름답지만 영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한 해가 지나면 또다시 찾아오는 계절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청춘도 메마르지 않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인생의 빛나는 여러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의 나이, 이십 대 초반이다. 나무로 치면 겨우내 씨앗이었다가 이제 막 자라난 묘목이겠다. 필자의 또래만 보면 참 좋을 때라며 부러워하시는 어르신들껜 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오랜 세월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나간 끝에 마침내 단단해진 당신들의 삶엔 젊음과는 또 다른 찬란함이 있다는 말. 그래서 필자는 웬만한 바람 앞에선 흔들리지 않는 당신들의 굳건한 밑동이 부럽다는 말.
한 번의 봄이 지날 때마다 덧그려지는 나이테들 사이로 청춘의 기록이 하나둘 쌓여간다. 분명 모든 봄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유독 꽃샘추위나 황사가 심한 봄엔 한없이 움츠러들 뿐 새파란 초목마저 눈에 차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돌아온다. 일 년을 가로질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에게로 다시 날아온다.
언젠가 필자의 안에서 아주 조금의 반짝임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스스로 청춘을 종결시키진 않으려 한다. 어느새 굵직해진 몸통 탓에 굽어보지 못할 뿐, 한때 동경했던 것을 닮은 밑동 아래론 분명 뿌리마다 이슬이 맺혀 있으리라.
빛나는 청춘에 한 점을 찍어 내일로, 모레로 선을 긋는다. 조금은 삐뚤빼뚤한 그 선이 끊어지지 않고 뻗어나가길 바란다. 만물이 푸른 봄철에는 완결이 없기에 필자는 사계를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