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마주해야 한다. 이들은 위협적인 무기가 돼 여성의 존재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집어삼킨다. ‘실존의 자격’이라는 구(句)가 소멸해야 하는 언어인 까닭은, 누구도 감히 타자에게 ‘존재할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여성은 싸우고 투쟁해야만 자기 몫을 지킬 수 있다. 허락을 구하며 걸어온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겠다는 선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는 이전의 역사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절규이며, 지속된 차별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다짐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토록 처절히 호소하는 여성에게 평화를 요구한다. 이 단순한 논리가 그들의 세계에 절박함이란 없음을 증명한다.

 ‘평화는 침묵에서 온다’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이 논리는 언제나 다수, 즉 강자의 편에서 서술된 서사로부터 탄생하기 때문이다. 분노해야 마땅한 일에 분노하는 여성들은 왜 예민하다는 지적을 받아야 하는가? 조용하고 차분하게 의견을 말해도 세상에 전해진다는 것. 이 아주 작은 차이가 바로 권력임을, 다수 세력은 이해하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의 문장처럼 새로운 인식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자신만의 언어를 소유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약자다. 여성이 고유한 언어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저서 「자기만의 방」에서 말한다. ‘무리하게’ 어떤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의미를 보여 줄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 도중에 넌지시 비쳤던 아주 사소한 것들, 반쯤 잊힌 것들이 떠오를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는 데 근거가 필요치 않으며 글 속의 내가 오롯한 자신으로 바로 설 수 있는 날이 올 때, 여성과 남성의 위치는 좀 더 대등해진다. 모든 여성은 자신이 쓰고 싶은 것만 쓰기를 택해야 한다. 그제야 여성에게 평화를 강제하던 세력 또한 깨달으리라. 여성은 단 한 순간도 침묵한 적 없음을. 지난 모든 순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어떤 이름’을 가진 존재가 숨 쉬고 있었음을. 여성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어문 20 나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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