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데 영화나 보러 갈까?’란 생각을 한 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생활인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본지 기자단은 지난 21일(화)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한국영화박물관’에 다녀왔다. 한국영화박물관 상설 전시에선 한국 영화의 역사를 담은 전시 ‘한국영화를 보다’와 초기 영화의 기법을 다룬 전시 ‘초기영화로의 초대’를 만나볼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몰랐던 영화 세계 속으로 들어가보자.


박물관에서 찾은 한국 영화의 시작
전시는 ‘한국 영화를 보다’부터 시작된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지난 1901년 미국 여행가 버튼 홈즈(E. Burton Holmes)가 찍은 조선 영상이 보였다. 해당 영상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최초의 영화다. 당시 조선엔 영화란 개념이 없어 ‘활동사진’이란 이름으로 고종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영화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1919년엔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1919)가 등장했다. 이전까지 영화는 서구에서 수입돼 우리나라 대중에게 전해졌다.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는 주인공이 악독한 계모에게 복수한단 내용을 담고 있다. 한쪽 벽에 제시된 영화 설명을 읽으며 해당 영화가 영화와 연극이 합쳐진 연쇄극 형태로 제작됐단 사실을 알게 됐다. 연극 공연 중 특정 순간에만 무대 불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된단 사실이 흥미로웠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조선은 일본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됐다. 우리 영화 역시 군국주의의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군국주의를 선전한 영화엔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서광제 감독의 <군용열차>(1938)와 일제의 식민지 아동 교육이 담긴 최인규 감독의 <수업료>(1940)가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영화엔 당시 혼란했던 시대가 담겼다. 일제 통치 당시 우리나라는 영화를 제작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 제작 체계가 무너지고 기자재가 낙후된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의 정체성을 담은 민족영화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노력 끝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 등 광복을 주제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영화인은 전선에 파견되거나 피난지로 흩어졌다. 전쟁 상황에서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을 비롯한 한국 영화는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전후 영화엔 당시 한국 사회의 파괴와 빈곤, 무질서가 그대로 담겼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은 가정주부인 ‘선영’이 댄스파티에서 만난 남성과 불륜을 저지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에선 서구 문화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관심과 기혼자의 도덕적 타락을 드러내며 보수적이었던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960년대 황금기를 맞이한 영화 산업은 1970년대부터 다양한 여가 문화와 엄격해진 검열 정책으로 불황에 빠졌다. 전시장 한쪽에 제시된 인포그래픽(Infographic)은 1960년대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1960년 92편이었던 제작 편수는 1969년 229편으로 2.5배 증가했다. 극장 수는 1961년 302개에서 1971년 717개로, 관람객 수는 1961년 5860만 명에서 1969년 1억 7300만 명을 기록했다. 당시 대부분의 영화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다뤘다. 현실적이고 친근한 이야기는 대중의 공감과 이입을 불러왔다. 교과서에서 한 번쯤 봤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도 이때 등장했다. 해당 영화는 어린 딸이 바라본 과부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담아 당시 보수적인 시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엔 가정에 TV가 보급되고 검열이 엄격해져 영화계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비해 관객 수도 약 700만명 감소했다. 

불황 속에도 빛은 있었다. 신인 감독들은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었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1974)엔 상경한 젊은 여성이 유흥업소로 내몰렸던 당시 사회 모습이 담겼다. 당시 암울했던 청년들의 모습을 작은 스크린으로나마 살펴보며 공감할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만난 ‘Street 1980’이란 이름의 전시 공간엔 형형색색의 1980년대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이곳에 서 있으니, 마치 과거 극장을 찾은 듯이 설렜다.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포스터도 눈길을 끌었다. 바로 1980년대 등장한 에로영화 포스터다. 1979년부터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우민화 정책으로 성에 대한 검열이 완화돼 에로영화가 다수 제작됐다. 당시 관객의 호응은 뜨거웠지만 한국 영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함께 생겨났다.

▲전시장 왼쪽 ‘Street 1980’ 공간에 전시된 1980년대 영화 포스터다.
▲전시장 왼쪽 ‘Street 1980’ 공간에 전시된 1980년대 영화 포스터다.

한국 영화, 세계를 향한 도전
1990년대 한국 영화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비디오 시장이 확대되며 가정에서 영화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1955년 다양한 채널과 고화질 영상을 제공하는 케이블 TV가 출범하자 대기업은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영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대기업과 함께한 젊은 영화인은 감독 주도의 체제에서 벗어나 사전에 영화를 계획하는 ‘기획 영화’를 제작했다. 기획 영화의 등장으로 제작 업무와 기획 업무가 분리되며 영화 현장의 전문성이 강화됐다. 가장 대표적인 기획영화인 김의성 감독의 <결혼 이야기>(1992)는 기존의 진부한 멜로 영화에서 벗어난 젊은 커플의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로 평가받는다. 1998년엔 다수의 상영관을 가진 멀티플렉스(Multiplex)가 국내에 처음 등장했다. 멀티플렉스는 쇼핑센터, 식당, 공연장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발달해 영화 산업의 규모를 키웠다.

2000년대엔 감독의 뛰어난 창의성과 대기업 자본이 만나 완성도 높은 작품이 탄생했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웰메이드(Wellmade) 영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시를 둘러보다 익숙한 제목의 영화 포스터를 발견했다. 바로 현재까지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2005), 추창민 감독의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포스터다. 이 외에도 해외로 뻗어나간 한국 영화 포스터를 살펴볼 수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은 칸영화제의 황금 종려상 등 해외에서만 약 200개의 상을 휩쓸며 우리나라 영화의 위상을 높였다. 포스터 아래 유리관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기생충>(2019)에서 배우들이 실제로 입었던 의상이 전시돼 있었다. <기생충>의 ‘기택’을 연기한 송강호 배우가 입었던 옷을 직접 보니 영화를 보며 느꼈던 축축한 공기가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전시 한쪽 면에 마련된 아카이브(Archive) 코너에선 영화 포스터와 필름, 음악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해당 공간에서 <건축학개론>(2012)을 검색해 OST ‘기억의 습작’을 감상했다. 영화 속 주인공의 풋풋한 첫사랑이 느껴졌다. 아카이브 코너 속 포스터를 눈에 담으며 걷다 보니 거대한 화면이 보였다. 화면엔 ‘한국영화 100선’으로 선정된 영화의 주요 장면이 나타났다.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조사한 ‘한국영화 100선’에선 한국 영화 초기부터 2012년까지의 역사를 보여줬다. ‘한국 영화를 보다’ 마지막 섹션엔 트로피와 연출 노트 등 한국 영화인의 소장품이 전시돼 있었다. 금빛 트로피엔 한국 영화가 밟아온 길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낡고 바랜 연출 노트에선 영화인의 열정과 애정이 느껴졌다. 

영화 기법의 시초를 만나다
영화의 초창기는 어땠을까. ‘초기 영화로의 초대’ 전시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이곳엔 에디슨(Edison)이 1889년 발명한 1인용 영사기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가 재현돼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동전을 넣으면 약 30초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구다. 키네토스코프에 원형 주화를 넣자 에디슨이 만든 세 편의 영화가 재생됐다. 바로 옆에선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영화 공개 상영회’ 현장을 만나볼 수 있었다.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Lumiere)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는 촬영, 인화, 영사가 모두 가능한 장치였다. 한편에 설치된 시네마토그래프의 손잡이를 한 번 돌리자 1895년 12월 프랑스의 그랑 카페 인디언 살롱(Grand Cafe Indien Salon)에서 처음 상영된 흑백 영화가 스크린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며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영화 공개 상영회를 재현한 공간이다.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영화 공개 상영회를 재현한 공간이다. 

시네마토그래프를 지나자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알리스 기(Alice Guy)를 만나볼 수 있었다. 알리스 기는 크로노폰(Chronophone) 시스템으로 기존 무성 영화에 소리를 삽입했다. 틴팅(Tinting)과 토닝(Toning) 기법으로 무색 영상에 색을 입혀 영화의 발전을 이끈 알리스 기는 영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약 1000편이 넘는 작품의 감독을 맡았지만 알리스 기의 이름은 여성이란 이유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여성은 정교한 연출을 할 수 없을 거란 당시 편견 탓에 알리스 기의 수많은 작품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알리스 기가 감독을 맡은 <예수의 생애>(1906)는 대작으로 평가 받았지만 감독은 남성의 이름으로 기록됐다. 전시된 작품과 함께 알리스 기의 영화 인생을 짧게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당당해 보였던 사진 속 알리스 기의 눈빛이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달세계 여행>(1902) 체험 공간에 들어가니 우주여행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시된 화면에선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감독의 <달세계 여행> 영화 중 일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화엔 멜리에스가 발견한 ‘스톱모션(Stopmotion) 기법’이 사용됐다. 스톱모션은 정지된 물체를 움직이는 것처럼 만드는 기법이다. 멜리에스는 고장 난 카메라 영상 속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해당 기법을 영화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한 화면이 사라지며 다른 화면이 나타나 융합되는 디졸브(Dissolve) 기법, 어두웠던 화면이 점차 밝아지는 페이드인(Fade in) 기법도 멜리에스가 발명한 편집 기술이다. 멜리에스는 스톱모션을 사용해 최초의 SF영화인 <달세계 여행>과 최초의 공포영화 <악마의 성>(1896)을 제작했다. 당시 멜리에스가 발명한 편집 기술과 특수효과는 오늘날 다채로운 영화의 기반이 되고 있다.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감독의 (1902) 주요 장면을 채색할 수 있는 체험 장소다.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es) 감독의 (1902) 주요 장면을 채색할 수 있는 체험 장소다.


한국영화박물관에서 본지 기자단은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자유롭게 이동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돼 과거의 감동과 현대의 혁신을 동시에 체험한 듯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한국영화박물관에 방문해 보길 바란다. 다양한 전시품을 따라 걷다 보면 영화가 가진 숨은 매력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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