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던 날_김연주(저동고등학교)

생명체는 간혹 얼떨떨한 상황을 맞이한다. 그 순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에 공격을 당할 때이다. 공기를 먹으며 사는 인간은 고농도의 미세먼지를 만났을 때이고 물 없이는 살 수 없는 해양생물은 물보라가 강한 폭풍우에 갇혔을 때다. 고래는 비가 몰아치는 폭풍을 만나면 특이한 행동을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심연에서 몸을 웅크린다. 나는 고래의 그런 특성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 집에도 고래 한 마리가 살기 때문이다.

전성기가 지난 고래는 지탱이 어려운 커다란 풍체를 갖고 있다. 커다란 뼈대만이 지나온 젊은 시절의 훈장이 된 할아버지. 까만 피부가 흑동고래를 연상케 하는 그는 매일 밤 버스를 몰고 거리로 향한다. 새벽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밤 열 시. 학원이 문을 닫는 시간은 할아버지를 학원가에 맴돌게 했다. 학원 버스기사인 할아버지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십오 인승의 노란 버스. 그것은 그의 밥줄이자 삶의 원천이다. 자신과 일주일에 세 번씩 노인정에 가는 아내 때문일까. 아니면 오만 원 씩 용돈을 쥐어 줄 손녀가 있어서일까. 금융회사에 퇴직한 뒤에도 할아버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칠십이 세이신 할아버지. 그는 회사에서 치열했던 경쟁을 마친 뒤 퇴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쉬어야 한다는 가족들의 얘기 속에서도 웃지 못 하셨던 할아버지.

아홉시 정시 출근이 사라졌다는 것. 자신을 불러 줄 회사가 없다는 사실은 그를 괴로운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결국 퇴직한 지 이년이 되던 날. 할아버지의 몸은 점점 마르기 시작했다. 당시 주름 진 얼굴에서는 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결국 오년 전 할아버지는 면허시험에 붙어 학원 버스기사가 되셨다. 하지만 그동안의 시간이 고됐었던 걸까. 할아버지의 몸은 살집이 붙지 않았다.

큰 폭풍이 지나간 후 나는 고삼이 됐고 집에서는 베테랑 운전수가 생기게 됐다. 할아버지는 일곱시까지 학생들을 학원에 내려다 주었고 고삼인 나도 오층짜리 학원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그렇게 우리 집 운전수의 첫 일과가 끝난다. 그 후 세시간의 기다림이 있다는 지겨운 표정이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그 기다림을 까만 밤이 관통하는 버스에서 보낸다. 나 역시 같은 학원가를 다녀서일까. 어두운 차에 갇힌 고독한 남자를 몇 번이고 마주쳤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할 수 없었다. 마치 할아버지가 큰 비로 밤바다에 갇힌 고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거센 빗물로 수면에 올라올 수도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고래. 그 무기력한 고래의 모습은 영어학원을 간 나를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꽁치 영감 왔네. 오늘 운전은 힘들지 않았고?”

현관문으로 향하는 자주색 잠옷이 보였다. 비가 내려 관절이 쑤신다는 할아버지. 나는 할머니의 말에 양 팔을 주무르는 할아버지를 봤다. 얇은 다리는 남색 바지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밖에 비도 오는데 성주랑 김서방은 집에 온 거지? 아버지들의 공통 된 습관인 가족 안부 묻기엿다. 성주는 일찍 나가야 된다고 잠들었고 김서방은 야근이래. 배는 안 고프고, 꽁치 영감? 할머니는 엄마, 아빠의 안부를 전하며 ‘꽁치’라는 단어를 반복했다.

“꽁치라고 부르지 좀 마. 포장마차에서도 서비스로 주는 게 꽁치여. 아주 나 놀리는 맛에 살지?”

퇴직을 한 뒤 살이 빠지는 할아버지를 보며 꽁치라 부르는 할머니. 그녀는 평상시 그 한마디에 배를 잡고 웃다가도 할아버지를 안쓰럽게 보곤 한다. 할머니가 전보다 더 할아버지를 살뜰히 챙기기에 그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집에 온 할아버지의 손목부터 살피는 모습에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빗물이 맺힌 손목은 퉁퉁 부어있었다. 장시간의 운전은 손목을 붉고 부어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은 손목은 눈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피로한 눈을 비비는 할아버지는 재킷과 양말을 벗어 던졌다. 아이들과 바뀌지 않는 신호등에 시달려서일까. 마루에 요를 깐 뒤 벌러덩 누워버렸다. 빗소리에 맞춰 덜덜 떠는 할아버지를 보자 고래가 아닌 꽁치의 모습이 연상됐다. 열두시가 된 시계를 보며 불을 끄는데 작은 손이 느껴졌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아버지의 대단한 점이 뭔 줄 알어? 돈 버는 자식들도 있고 자기 몸도 아픈데 일을 놓지 않는다는 거야. 자신이 밥 벌이를 못하면 가족의 기둥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맨날 할아버지 팔, 다리 얇다고 놀려도 진심은 그게 아니여. 너희 할아버지는 참 대단한 사람이야.“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를 봤다. 어둠 속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거센 빗줄기로 밤바다에 잠식 된 고래같은 할아버지가 보였다.

고래는 폭풍우를 만나면 견디는 게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몇 번의 빗줄기를 견디다 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는 지혜를 얻게 된다. 곧 고래는 깊은 심연에서 헤엄을 쳐 폭풍우를 피하게 된다. 생존을 위한 고래의 몸부림을 떠올렸다.

더 거세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역시 거센 폭풍우를 견디려는 듯 몸을 떨었다. 늙은 고래의 몸부림이었다. 피로 가득한 얼굴을 보며 부은 손목을 잡았다. 떨림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늙은 고래는 그제서야 생존법을 터득한 거 같았다. 견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할아버지, 너무 힘들면 가족들에게 기대도 돼요. 할아버지는 그동안 많은 짐을 혼자 지고 왔어요.”

어둠 속 작은 목소리가 퍼졌다.

유독 많은 비가 내리던 날. 그제서야 나는 할아버지의 아픈 곳을 감쌀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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