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경 교수의 숙명 타임머신]

<숙명타임머신>을 타고 순헌황귀비, 영친왕이 온다. 이번 학기부터 여론면 <숙명타임머신> 코너에서는 당신이 몰랐던 숙명의 역사 속 인물이 소개된다. 그들의 얘기를 지금부터 들어보자.

<그래픽=윤나영 기자>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조선 왕실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여 '황제'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가장 많이 알려진 여인은 엄비가 아닐까 한다. 그것도 그녀의 외모를 폄하하는 '못생긴'이라는 수식어와 함께이다. 명성황후는 사진이 남겨진바가 없어 외모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엄비의 경우 양장이나 황귀비의 복장을 한 사진 등이 남겨져 있다.

역사 속에서 여성은 흔히 못생기고 욕심이 많다거나 혹은 너무 예뻐 남성을 홀리는 존재로 등장하곤 한다. 여성이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역사 속에서 여성은 늘 낮게 평가되거나 왜곡되어지기 일쑤인데 엄비에게는 '못생긴'이라는 수식어가 그녀의 '신분'과 더불어 부정적 해석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엄비는 만 5살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으면서 승은을 입었다가 궁궐에서 쫓겨나 10여년을 지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제일 먼저 엄비를 불러들여 가까이 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수립된 직 후 40살이 넘어 아들 은(垠)을 낳고, 귀인으로 책봉되었다. 1900년 8월에 순빈으로 봉해졌고, 1901년 순비로 책봉되어 엄비로 불리게 되었다. 1903년에는 순비에서 다시 황귀비로 진봉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의 정치적, 정신적 동반자이자 나중에 황태자가 되는 이은의 어머니였던 엄비의 지위는 상승될 수밖에 없었다.

엄비는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의 동반자로서 사라져야 했던 중세라는 고목에 여성교육이라는 새로운 근대의 싹을 심은 여인이었다. 고종이 교육조서를 발표하자 황실의 여인들은 엄비를 중심으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학교건립에 뜻을 두었다. 엄비는 1905년 엄주익이 양정의숙을 건립하는데 내탕금을 내어 도와주었고, 1906년 4월에는 진명여학교를 5월에는 명신여학교(1909년 숙명고등여학교로 명칭 변경)를 설립하였다. 당시 세간에는 이 세 학교를 양반학교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아예 귀족여학교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진명여학교는 여성교육기관이면서 서양식 교육을 지향하였고, 명신여학교는 귀족여학교를 표방하여 주로 양반층의 여아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된 영친왕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고종과 엄비는 격렬히 반대하였지만 힘을 잃은 황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엄비는 1911년 7월 58세로 서거하였다.

엄비가 생전에 기거하였던 경선궁은 세상을 떠난 뒤 위패를 봉안하던 덕안궁으로 사용되었다. 이왕직은 1929년 5월 위패를 육상궁으로 옮기고 6월에는 이 터를 매각해 버렸다. 오늘날 국세청 남대문별관과 서울시의회 쪽이 덕안궁의 원래 위치이다. 서울시에서는 국세청 남대문별관을 허물고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의 여인으로 여성교육의 싹을 틔웠던 황귀비를 재조명할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라도 함께 조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