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 교과서를 통해 왕들의 업적이나 그 시대의 사건들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 흥행하고 있는 영화 <광해>는 우리가 몰랐던 다양한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영화 속의 모습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모습은 정말 진실한 것일까. 지금부터 다룰 내용에서는 우리가 평소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훌륭한 성왕의 대표로 손꼽히는 세종과 정조, 조선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과 광해군, 이 조선 왕들이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두 명의 세자빈을 퇴출시킨 세종>

제 4대 1397~1450

어렸을 때부터 난 지독한 책벌레였어. 온 대궐이 꽁꽁 얼어붙은 추운 밤에도 밤을 새워 책을 읽곤 했지. 결국 아버지(태종)께서 내가 병이 날까 걱정해 저녁에는 책을 읽지 못하도록 금하실 지경까지 이르렀어. 밥을 먹을 때도 좌우에 책을 펴놓는 나를 아버지께서는 염려스럽게 바라보셨지만 내심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지. 그런데 말이지, 어쩌면 난 책읽기를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구실로 삼았던 건지도 몰라. ‘피의 숙청’으로 알려진 아버지의 시대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거든.

내가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일련의 ‘왕자의 난’과 ‘외척 제거 작업’은 계속 됐어. 그러나 난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일언반구의 언급도 할 수 없었지. 아버지는 “모든 왕들은 성군으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역사는 왕들에게 악역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악역을 자처하셨지. 아버지가 숙청하려는 대상에는 내 장인 ‘심온’도 포함됐어. 장인과 난 서로 친숙하고 좋아하는 사이였지만, 아버지께선 왕권에 가장 큰 위험이 될 인물로 왕을 사위로 둔 심온을 생각하셔서 미리 제거해야 할 인물로 여기셨던 것 같아. 박은 등 여러 신하가 “그 아비에게 죄가 있으니 그 딸을 왕비로 둘 수 없다”며 왕비 폐출을 주장할 때도 난 침묵으로 일관했어. 결과적으로 왕비는 보존됐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폐비 문제’에 대해 국왕인 내가 어떤 의견을 표명했다면 상왕이라도 무시는 못했을 텐데 싶어. 어찌 보면 부부관계를 포함해 모든 친인척 관계까지 정치적으로 규정되는 이 궁궐 안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일거야.

내가 왕이였을 때, 십 년 사이에 두 번이나 세자 이향의 세자빈을 폐출하는 일이 있었어. 나는 첫번째 세자빈을 멀리했지. 독수공방 신세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잘라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낸 뒤 술에 타서 남자에게 먹이면 그 남자는 그 여자만을 좋아하게 되고 신발 주인을 싫어하게 된다’는 술법을 듣고, 세자가 좋아하는 두 시녀의 신발을 가져다가 숨겨놨는데, 이것이 결국 밝혀지고 그녀는 폐출됐어. 그래도 첫 번째 세자빈은 두 번째 세자빈에 비해서는 점잖은 편이었어. 두 번째 세자빈은 태기가 있다고 한 지 한 달 만에 낙태를 했다고 했어. 이는 거짓말로 밝혀졌지. 게다가 시녀와 동침한 사실까지 밝혀져 궁궐 안팎으로 소문이 났어. 시녀와의 동성애 사건은 묵과할 수 없는 폐출 이유가 됐지.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받는 나에게도 세자빈과 관련해 이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게 했지.

 

<남다른 총명함으로 왕세자가 된 광해군>

제 15대 1571 ~ 1641

1580년대, 나의 유년시절은 조선왕조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였어. 붕당정치가 심화되고 사림의 세력도 강해지고 있었지. 대명외교나 대동법과 같은 나의 업적이 평가 절하되고 철저히 외면 받게 된 데에도 그들이 반정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한 목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키며 나를 쫓아내고 집권을 이어갔어. 의도적으로 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계속 하면서 내 본 모습을 가려버리기도 했어.

왕세자로 책봉되기 전 그 시기를 떠올려보면, 사실 내 아버지(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후계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내색을 하지 않았어. 열세명의 아들 가운데 누구를 왕세자로 세워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아마 쉽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가례를 한 지 8년이 지나도록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던 차에, 내 어머니인 후궁 공빈 김씨가 임해군과 나를 낳았지. 우리 어머니는 기품 있는 외모에 겸양과 덕성까지 갖춰 아버지는 물론, 정비 의인왕후의 총애까지 받았어. 그런데 이 어머니께선 내가 3살일 때 동생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돌아가셨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늘 그늘진 얼굴로 쓸쓸해하던 내 곁에는 나를 어머니처럼 돌봐주던 김 상궁이 있었어. 후세에는 정적들이 악의로 붙인 ‘개똥이’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대단한 미모에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고 안목이 높고 의리도 있어 궁녀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어. 젊은 궁녀들에게 유학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지. 그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아버지와 의인왕후에게 나의 총명함을 넌지시 알려주려 애썼어. 김 상궁의 도움으로 의인왕후도 차츰 내게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치 친아들처럼 나를 귀여워해 불러다 식사를 같이 하는 일도 많아졌어.

하루는 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됐는데, 아버지께선 이런 질문을 하셨어. “반찬 중에 무엇이 으뜸이냐?” 쇠고기, 연뿌리, 송이버섯 등 귀한 반찬들이 보였지만 난 “소금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지. 왜 소금이 으뜸이냐고 되물으시는 아버지께 “소금이 없으면 백 가지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소금을 답으로 낸 나를 아버지께선 기특해하셨어. “네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덧붙이셨는데, 그에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지. 하루는 아버지께서 왕자들 앞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마음대로 고르게 하셨어. 왕자들이 다투어 보물을 골랐는데, 난 붓과 먹을 집었어. 그런 일을 통해 아버지는 나를 왕세자로 앉히기로 마음을 먹게 되신 것 같아.

 

 <왕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못한 연산군>

제 10대 1476 ~ 1506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역사서에 남아있는 나에 대한 평가는 성리학적 관점과 당파적 관점에서 쓰였다는 걸 말하고 싶어. 그런 관점에 얽매이지 말고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봐주면 좋겠어. 당대는 신권이 왕권에 맞서는 이념시대였어. 성리학의 기준에서 볼 때 나를 폭군으로 지목하기에 꼭 들어맞는 사건이 적잖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야.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림세력이 대거 죽임을 당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나를 폭군으로 지목할 때 항상 거론되는 내용이지. 그러나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는 그 규모나 참혹성 면에서 훨씬 심했는데도 중종은 폭군으로 몰리지 않았잖아. 내가 폭군으로 몰린 이유는 인과 덕을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제왕의 신분으로 풍류를 즐기고 권력과 힘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패도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이야. 그렇지만 이게 보위에서 쫓겨나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거잖아.

원로재상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베푸는 잔치를 양로연이라고 하는데, 이 양로연에서 예조판서 이세좌가 내가 내린 하사주를 반이 넘게 흘려 내가 입고 있던 곤룡포를 적시는 일이 있었어. 나는 실수를 가장한 고의적인 행동으로 여겼지. 이를 매우 불경하게 생각해 승정원과 협의한 뒤 그를 국문토록 했어. 그리고 6개월 후에는 홍귀달 사건이 일어났어. 왕통을 잇는 매우 중요한 행사인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졌는데, 홍귀달은 감히 병명도 밝히지 않은 손녀의 병을 핑계로 손녀딸의 입궐을 막았어.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 이세좌 사건과 홍귀달 사건은 별개의 사안이긴 하지만 왕권과 신권세력, 훈구세력 사이에 권력투쟁이 계속된 당시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해. 난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려면 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왕권에 대한 신권의 도전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

그리고 내가 풍류를 즐기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연산군일기>에 묘사된 것과 같이 황음무도한 군왕으로 단정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돼. 난 아버지(성종)의 성품을 꼭 빼닮았어. 아버지는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많은 비빈을 거느린 군왕이었지. 그리고 나를 포함해 28명의 자녀를 뒀어. 그런데 아버지의 여인들은 정숙한 여인들이고 나의 여인들은 음란한 여인들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야. 내가 술과 여인, 시와 사냥을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를 닮은 거야. 우리가 재위한 시기가 조선왕조 5백년을 통틀어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해줘야해. 우리 부자의 낭만적인 기질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 같아. 

<아버지의 한을 잊지 못하는 정조>

제 22대 1752 ~ 1800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왕위에 등극하자마자 당당하게 말했지. 당시 조정의 중추였던 노론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의사에 대한 표시이자 선전포고였어. 노론의 교묘하고 강력한 방해공작을 허물고 왕위에 올랐던 나는 건재한 정적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고, 주체성을 버리고 허수아비가 되기는 더욱 싫었어.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꼭 풀어드리고 싶었어. 이런 나의 태도에 당시 권력 실세인 외척과 일부 노론세력은 긴장했지. 내가 왕이 된 당시, 신권의 위세가 이미 왕권을 넘어서 있는 상태였기에 함부로 제압하려 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즉위 초기 나는 아버지와의 천륜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의리론을 내세웠어. “당신들 당파가 정황에 따라 충신도 되고 죄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당신들이 나름의 의리를 지키듯이 나 또한 부자간의 의리가 있지 않겠어?” 이렇게 나는 탕평의 논리로 맞서면서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높여주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명의리론과 노론의리론의 정당성을 인정해줌으로써 화해의 의사를 표명했지.

내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됐고, 내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그녀를 사랑했어. 그녀가 나를 낳았을 때,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굉장히 기뻐했어. 그는 승진을 거듭해 영의정에 이르고, 노론 외척당인 북당의 영수로 군림하게 됐지. 한데, 당시 할아버지(영조) 대신 대리청정하고 있던 아버지는 소론의 정치적 견해에 동조함으로써 외할아버지와 등을 돌리게 됐어. 이로 인해 어머니는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됐고, 결국 그녀는 세손을 왕으로 세워주겠다는 그녀의 아버지 말에 따라 남편을 포기해버렸어. 싸늘한 태도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참 무섭고 흉한사람이군. 세손과 오래 살려고 나를 버리는가”라고 했지. 아버지는 뒤주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신음하며 굶어 죽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를 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녀의 일기 <한중록>에는 “서글프도다. 그날의 일을 내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참고 참아 모진 목숨을 보전하며 하늘만 부르짖었다”라고 쓰여 있어.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내 아버지가 죽고 나서 노론의 관심의 초점은 내가 됐고,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지키려 했어.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왕위에 오른 나는 단호하게 늙은 외조부 홍봉한과 외가 일족에게 모조리 사약을 내렸어. 왕권 강화를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지. 어머니의 눈물은 언제라도 씻어드릴 수 있지만 아버지의 눈물은 때를 놓치면 영영 씻어드릴 수 없었거든. 

 

 

참고문헌 :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 연산군을 위한 변명 (신동준) / 이산 정조대왕 (이상각) / 역사인물 다시 읽기 광해군 (한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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