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명여고문학상
꽁트 부문 청송상한솔오롬(이화여자고등학교)
숙대신보  |  shinbosa@sm.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0.05.3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우연>

그 사람은 우연이었다고 말했다. 우연, 참 편리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한 시 십오 분, 남자가 철문을 밀며 골목으로 나온다. 헤진 남방 아래에 헐렁한 추리닝을 입은 남자. 남자는 검게 세팅 된 나의 유리창으로 흘끗 시선을 던지지만 그냥 지나친다. 방금 나와 눈이 마주쳤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백미러로 남자가 완전히 골목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한다. 나는 그제야 시동을 걸고 천천히 남자를 쫒아가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눈을 감고도 남자를 쫒아갈 수 있다. 지난 삼 년간 남자의 주말 동안의 행적은 제 시간에 도착하는 고속 열차처럼 정확하고 깔끔했으니까 그는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간다. 곧 참치 치즈 샌드위치 한 개와 아메리카노, 스낵바를 손에 쥐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공원으로 발을 돌려 자전거를 타는 연인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점심을 즐기겠지. 퍽이나 여유로운 성격이다. 문득 옆 좌석으로 고개를 돌리면, 갈색곰 인형이 지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이가 생전에 아끼던 곰 인형이다. 조금만 기다려. 나는 곰 인형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삼 년 동안 참아왔잖아. 이제 정말 조금이면 돼. 남자가 가게를 나온다. 손에 쥔 참치 치즈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스낵바를 확인하곤 입 꼬리를 씨익 올린다. 나는 다시 시동을 건다.
남자는 우연이었다고 말했다. 그건 정말 우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날 일어난 일들 중에 우연이란 골목의 끄트머리에 고양이가 서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알려 하지 않았다.
남자의 집은 차가 많이 다니는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인데도 차도와 이어져 있어서, 커브 길의 교통체증을 견디지 못 하는 사람들은 골목으로 들어와 그 구간을 건너뛰곤 했다. 나도 그런 성급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아이와 함께 외출을 하는 길이었다. 골목의 끄트머리에서 자동차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길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비키라고 클락슨을 울려댔다. 제법 큰 소리였는데도 고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클락슨을 울리며 나는 천천히 직진했다. 시끄럽다는 듯 동네 사람들이 창문을 열어 따가운 눈총을 쏘아댔다. 그제야 고양이는 골목 저 편으로 사라졌고, 나는 엑셀을 밝은 발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골목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온 것은. 순간적으로 나는 핸들을 꺾었고, 차는 벽과 강하게 충돌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어슴푸레 눈을 떴다. 놀라움이나 안도감 보다는, 아깝다는 듯 눈썹을 찡그린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저 남자는, 왜, 클락슨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렇게 급한 발걸음으로 골목을 튀어나왔을까. 왜, 조금 더 놀라지 않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옆 좌석을 손으로 더듬었다. 미적지근한 액체로 뒤덮힌 아이의 차가운 손이 손에 잡혔다.
덥다. 남자는 공원의 정자 위에서 샌드위치를 한 입 물며 햇빛을 쬐고 있다. 아이는 에어컨 바람을 싫어했다. 나는 창문을 내린다. 문득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일순 긴장감이 등 뒤로 타고 흘러내리지만,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벌써 내 얼굴을 잊었니? 난 한 번도 널 잊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아이의 죽음을 우연이란 말로 쉽게 정리할 수 있어. 그러나 나는 곧 핸들을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는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에게 만삭의 아내가 있다는 말은 그를 조사하며 듣게 되었다. 사고 몇 주 전에 실직을 했다는 말도,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는 말도, 그 지역이 위치적 특성 때문에 보험 사기가 자주 일어난다는 말도 그랬다.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던 남자의 치졸한 계획에 우리 모녀는 우연히 말려든 것이다.
남자가 다시 골목으로 들어간다. 세 시 삼십이분. 마지막 무대를 어디로 설정할 지도 제법 고민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 기다리는 일에 싫증이 났다. 나는 남자보다 빨리 무대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다. 무대에 가까워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자마자 나는 엑셀을 힘껏 밟는다. 자, 이제 우연의 시간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단어를, 나는 쓰러진 당신의 면전 앞에서 마구 내뱉어줄 것이다. 눈을 꼭 감는다.
그러니까 내가 그 목소리를 들은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빠!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감았던 눈을 부릅뜬다. 세 살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남자를 향해 아장아장 달려오고 있었다. 삼 년 전에 만삭의 아내가 있었다는 그. 핸들을 급히 돌려버린다. 파열음이 귓속에 내리꽂힘과 동시에 나는 시트에서 튕겨져 나간다. 익숙한 냄새가 번져나가는 차 안에서, 나는 힘겹게 눈을 뜬다. 깨진 창문 사이로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남자아이. 아까 창문을 열어놓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에어컨 바람을 싫어했단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남자아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 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남자를 내려다 보고 있었을까.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들여다 보는 남자를 향해 나는 굳은 입술을 벌린다. 우연이었어요, 이번에요.

숙대신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달려왔던 한 학기, 쉼표를 찍으며
2
광개토대왕릉비
3
적극적 참여로 총학 선거 투표율 높이자
4
제50대 총학생회 선거 앞두고 합동공청회 열려
5
가장 기억에 남는 숙대신보의 기사는?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발행인 : 강정애 | 편집인 겸 주간 : 강미은 | 편집장 : 하재림 | 발행처 : 숙명여자대학교|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정애
우)140-742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로 47길 100 숙명여자대학교 숙대신보사
행정실 ☎ 710-9150 (Fax) 706-2695 / 편집실 ☎ 710-9721 / 9152
Copyright © 2018 숙대신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mnews@sookmy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