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숙명의 다양한 정보를 발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숙대신보. 나 또한 한 명의 숙명인으로서 학교의 소식을 접하고 세상살이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데에 숙대신보가 아주 유용한 역할을 해 주기에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다. 우리 대학의 자랑거리와 새로운 행사들, 기쁜 일들, 생각해 볼 문제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줘 기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양한 분야의 다채로운 정보들, 타 과의 소식들과 졸업한 동문 이야기, 또한 박이 부정일지언정 본인으로 하여금 더 넓게 생각할 수 있게 하므로 한 대학의 신문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숙대신보에게 바라는 점이 몇 가지 있다. 이제껏 숙대신보를 읽어오면서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대학가의 논쟁거리가 될 만한 일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신문이 아니고서는 깊게 다루기 어려운 문제들, 대학생들이기에 궁금한 문제들이 숙대신보에는 적다. 우리 학교에도 얼마든지 논란이 될 만한 문제들이 많으며 신보가 아니고서는 심도 있게 조사해보고 취재해 볼만한 기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날카롭게 관찰하고, 신랄하게 꼬집어주는 것’이야말로 학우들이 숙대신보에 바라는 것이며 숙대신보는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가끔, 신보를 읽다 보면 초점을 벗어나는 기사들이 있다. 지난 10월 6일 발행된 1166호에 실린 교내 PBL수업에 관한 기사의 13문장 중 11문장이 ‘말했다’로 끝을 맺으면서 그저 여러 사람의 발언을 정리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또한 볼드체로 적힌 ‘공정성 문제’에 대한 내용은 그저 한 학우의 의견뿐이어서, 필자는 그 기사를 이해하는 데에 길을 잃었다.

기사란, 객관적인 사실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다. 그리고 기사는 기자의 주관과 가치관 없이는 정리될 수 없는 글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방향을 잃어버린 글에서는 정보의 전달은커녕 의미조차 읽어낼 수 없어 일종의 재화 낭비라고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사회면의 ‘키워드 진단-성’이라는 기사에서도 보였으며, 이런 부분들이 수정된다면 더 깊이 있는 사실 전달과 효과적이고 우수한 논지 전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태희(영어영문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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