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벚꽃이 지고 녹음이 무성해졌다. 교정의 모습을 보면 ‘예전에도 이렇게 녹음이 무성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30여 년 전 교정을 거닐었을 권순인(물리 76졸), 김정란(의류 80졸), 이성림(국어국문 78졸) 동문에게 우리 학교 과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우선, 예전 우리 학교 캠퍼스의 모습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김정란 동문은 현재 행정관 자리까지 드넓게 펼쳐져있던 ‘서관 앞의 잔디밭’을 떠올렸다. 또한 권순인 동문은 “강냉이나 뽀빠이 한 봉지를 들고 친구들과 잔디밭을 뒹굴면서 미래를 꿈꿨다.”며 그 때의 여유로웠던 낭만을 회상했다.


세 동문이 학교에 다닐 무렵인 1970년대, 총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불렸다. 또한 지금처럼 대표를 직선제로 뽑지 않고 학교에서 임명했다. 학도호국단 2기로 활동했던 이성림 동문은 “정숙을 중시하는 우리 학교 분위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약간의 제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으로 유신 반대 운동이 거세지면서, 우리 학교 학우들도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이 동문은 “당시 수학여행을 다녀 와보니 학교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어 학교 안으로 못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축제는 어땠을까? 사회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학교 축제만은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김정란 동문의 말에 따르면 부스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고, 가수의 공연을 보는 모습은 지금과 비슷했다. 세 동문은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의 추억으로 과별로 각기 다른 나라의 전통 춤을 추는 대회인 ‘민속무용 경연대회’를 꼽았다. 이성림 동문은 탈춤을, 김정란 동문은 플라밍고를 췄다. 김 동문은 “당시 3, 4학년 선배들이 40여 벌의 스페인 전통 의상을 손수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권순인 동문은 아라비아 춤을 췄는데, 외대 아랍어과 남학생이 직접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었다고. 권 동문은 “당시 금남의 장소였던 우리 학교에서 남학생과 연습을 하는 것은 영광스러웠을 정도였다.”며 웃었다.


예전에는 이처럼 문학, 예술 등에서 타 대학과의 교류가 빈번했다고 한다. 현재는 타 학교 뿐 아니라 해외 대학과의 교류도 이뤄지고 있으니 새삼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리 학교는 또 어떻게 변하게 될까. 벌써부터 ‘숙명’의 미래가 기대된다.
김희연 기자 smpkhy75@sm.ac.kr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