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숙케치]
부산 여행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였다. 그래도 바다는 답답한 서울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떠났다. 도망일 뿐이었던 여행은 부산이란 도시와 사랑에 빠지기 충분했다.
부산에 고작 이틀 있었지만 서울로 돌아간단 게 믿기지 않았다. 돌아가는 기차에선 마치 평생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인 듯 굴었다. 바다를 오래 바라본 것도 아니었고 특별한 감상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근처에 머물렀단 이유만으로 부산에 정이 붙어버린 모양이다. 바다가 감상적인 이유는 인간과 닮아서가 아닐까.
이 기억은 금방 잊힐 수도 있다. 한 달 혹은 일주일, 어쩌면 하루. 그렇고 그런 시간 속에서 난 바다를 잊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귀 뒤에 남은 모기 자국으로, 이 여행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남길 바란다.
사실 인상적인 여행은 아니었다. 스무 살이 되고 혼자 처음 떠나는 여행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걸까. 그토록 고대하던 바다는 해수욕장이 돼 사람들로 뒤덮여 있었고 태양 빛은 타버릴 듯 내리쬈다. 바다는 겨우 실내에 앉아 곁눈질로 훔쳐봤을 뿐이다.
부산 여행의 마지막으로 방문한 남포동 시장 골목에선 ‘세상’을 찾았다. 닫혀있는 가게가 늘어선 국제시장과 보수동 책방골목은 ‘세상’ 그 자체였다. 국제시장 아저씨의 망치질 소리는 세상을 울리는 괘종시계였으며 작고 고독한 책방은 온갖 인생이 모인 곳이었다. 필자는 삶과 세계가 담긴 남포동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시켰다.
돌아봐야 아름다운 게 영 아쉽다. 그것마저 인생 같다. 지나간 아름다움을 후회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행복을 놓치지 않도록, 스치는 사랑이 없도록 꼼꼼히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그럼에도 돌아보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벌써 다음을 걱정하고 있다. ‘새롭게 찾은 도피처가 더 이상 도피처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란 쓸모없는 걱정. 오랜만에 찾아온 아름다움도 잠시였다. 불현듯 찾아온 걱정이 날 불안하게 했다. 그러다 문득 그 불안마저 사랑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 부산 여행이 일종의 도피였다면 다음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바다, 책, 세상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여행이 되길 바란다.
여행의 의의는 사랑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는 건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수 있단 뜻이다. 타성에 젖어버린 삶에서도 숨어있는 새로움에 행복해하고, 감춰진 사랑을 발견하고 싶다. 우리의 인생이 늘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기초공학 23 박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