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의 여성들은 어떤 일을 하고 살았을까. 지난 5월 5일(금)부터 오는 10월 3일(화)까지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 - 일하는 여성들’ 전시가 진행 중이다. 지난달 18일(금), 본지 기자단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방문해 한양 여성들의 직업과 생활상을 엿보고 왔다. 가정 속 모습부터 도성 안 모습까지, 함께 전시를 관람하며 한양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자.


꺾이지 않는 한양 여성
한양 여성은 신분이 높을수록 활동이 제한됐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 지붕이 덮인 폐쇄형 가마를 볼 수 있었다. 여성이 이동에 사용한 가마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유교 사회였다. 외출 시 여성은 얼굴을 가리거나 가마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높은 신분일수록 그 억압은 더 심했다. 조선 이전 부녀자는 사면이 뚫린 평교자 가마를 주로 이용했다. 조선 건국 이후엔 사면이 막혀있는 가마를 이용했다. 이는 조선 전기 상소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상소문에선 엄격한 유교적 잣대로 부녀자들과 가마를 드는 장정 사이 접촉을 지적한다. 그 결과 일정 계층 이상의 본부인은 가마를, 나머지 부녀자는 말을 타는 것으로 결정한다. 조선 전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가마는 당시 여성을 향한 유교적 억압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여성에 대한 억압은 커져 갔다. 전시된 가마를 지나쳐 부녀자가 주로 머무는 안채와 마주했다. 전시장 한편에 있는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는 여성의 역할을 가르치는 규범서로 유교적 여성관을 고착화했다. 규범서엔 여성이 지켜야 할 덕목이 담겨 있었다. 여성의 계급은 왕실에서 부여하는 내명부 품계와 남편의 지위에 따른 외명부 품계로 나뉘었다. 일반 양인이나 천인 여성에겐 품계가 없었다. 본교 한희숙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조선시대 여성은 결국 남편의 지위에 따라 신분의 귀천이 나뉘었다”고 말했다. 가부장적 사상이 짙어지는 모습은 17세기와 19세기에 작성된 한 가문의 족보에서도 드러났다. 17세기 족보엔 태어난 자식의 순서대로 이름이 쓰였다. 이어지는 19세기 족보엔 태어난 순서에 상관없이 아들의 이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다. 짙은 유교적 이념 아래 여성에 대한 기록은 점차 축소됐다. 

그럼에도 여성의 기세는 위축되지 않았다. ‘규문수지여행지도’와 ‘어머니 강 씨가 남긴 가르침’에서 퇴색되지 않은 여성의 고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부녀자가 마땅히 알아야 할 행실을 그린 ‘규문수지여행지도’엔 여성이 지켜야 할 유교적 덕목과 여성상이 놀이판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유교관이 반영된 문헌 ‘어머니 강 씨가 남긴 가르침’은 유교적 여성상을 바탕으로 법도에 따라 가계를 경영하는 여성을 보여준다. 본 문헌에서 어머니는 법도에 어긋난 아들의 행동을 꾸짖는다. 특히 손바닥 모양 그림이 가장 눈에 띄었다. 어머니 강 씨가 오른손 손바닥을 그려 서명한 것이다. 여기서 부녀자가 가정을 돌보는 주체자였음을 알 수 있었다.

▲유교적 여성상이 드러나는 문헌 ‘어머니 강 씨가 남긴 가르침’이다.
▲유교적 여성상이 드러나는 문헌 ‘어머니 강 씨가 남긴 가르침’이다.


一當百한 궁궐 여성
왕비는 길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이를 장려하고자 친잠례란 궁중 의례를 주관했다. 조선시대 경제활동의 중심은 농업과 길쌈이었다. 여성들은 길쌈으로 직물을 짜 옷을 만들거나 세금을 내기도 했다. 직물 생산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소득을 얻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였지만 과정이 번거로워 생산량이 부족했다. 친잠례는 경제 활성화를 돕는 길쌈을 장려하기 위한 왕비의 주요 업무였다. 궁궐 문 안으로 들어가니 친잠례를 하는 왕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친잠례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왕비는 경복궁에서 누에고치의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린다. 이후 누에고치를 수확해 직접 길쌈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친잠례 중 왕비가 제사를 올리는 모습이다.
▲친잠례 중 왕비가 제사를 올리는 모습이다.

궁녀는 부서별로 하는 일이 달랐다. 수라간에서 일하는 궁녀들은 음식을 만들고 술을 빚었다. 침방에선 의복과 침구를 만들었고 수방의 궁녀들이 자수를 놓았다. 왕실 사람들의 목욕물 관리는 세수간, 세탁물 관리는 세답방의 궁녀가 수행했다. 상전을 가까이 모신 궁녀는 *지밀상궁이라 불렸다. 이들은 왕실 최측근으로서 서찰 심부름과 상전의 명을 전달하는 업무를 맡았다. 벽 한쪽에 길게 놓인 월급 지급 목록 ‘을미년분료발기’에서 궁녀의 담당 업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각 업무에 참여한 궁녀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홍현도 학예사는 “해당 자료는 을미년에 일했던 궁녀들의 활동을 보여준다”며 “오늘날 회계장부처럼 한양에서도 객관적 기록물을 남겨 일을 정확히 처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궁녀들의 월급 지급 목록이 담긴 ‘을미년분료발기’가 전시돼 있다.
▲궁녀들의 월급 지급 목록이 담긴 ‘을미년분료발기’가 전시돼 있다.

여성의 치료를 맡았던 의녀는 조선시대 남녀유별 사상을 바탕으로 탄생한 직업이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엄격히 구분했던 조선시대엔 치료가 목적이라도 남녀가 서로 가까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녀자의 치료를 위한 의녀가 존재했다. 의녀는 왕실 의료기관인 내의원과 백성 의료기관인 혜민서에서 일했다. 맥의녀는 맥을 짚는 역할을 했으며 침의녀와 약의녀는 각각 침술과 약술을 담당했다.

궁궐 밖을 무대로 삼다
한양 여성들은 저잣거리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여성 상업이 활발하게 진행된 시장을 ‘여인전’이라 불렀다. 궁궐 밖 시장 거리를 걷다 한쪽에 놓인 「동국여지비고」와 마주했다. 앞선 자료는 여성들이 침자전에서 은침과 바늘을, 분전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며 상업 활동을 펼쳤음을 보여준다. 여인전은 규모가 작은 시전임에도 불구하고 노역과 공납의 의무가 있었다. 다른 시전 상인에 비해 소득이 적은 여인전 상인들에게 해당 부역은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꿋꿋하게 어려움을 딛고 여인전의 자리를 지켰다. 머리 장신구, 분항아리, 비녀, 바늘집 등 전시된 유물을 보며 자신의 직업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투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여인전에서 판매된 화장도구다.
▲여인전에서 판매된 화장도구다.

성리학 이념에 기반한 조선에서 무속 신앙을 따르는 무녀는 한양에 출입할 수 없었다. 비치된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에서 관련 내용을 엿볼 수 있었다. 무녀는 죽은 자의 영혼에 접신해 길흉을 예측하고 굿을 행했다. 하지만 한양은 유교의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불교와 무속 문화로부터 왕궁이 위치한 도시를 보호하고자 무녀는 법적으로 도성 안에 거주할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기니 가운데 사탑을 중심으로 오색 연등이 걸린 공간이 펼쳐졌다. 이어서 여러 무속 신의 무신도가 걸린 신당을 볼 수 있었다. 조선 초기 도성 내엔 대규모 사찰이 존재했다. 비구니 사찰은 왕이 죽은 후 남겨진 후궁이나 권력에서 밀려난 왕실 여성들, 나이 많은 궁녀들이 출가하는 장소였다. 조선 후기 사찰은 유교적 압박에 따라 도성 밖으로 밀려났고 무녀는 도성 인근에서 무속 활동 외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무신도가 걸린 신당이다.
▲무신도가 걸린 신당이다.


전시에선 조선시대 한양 여성이 신분과 직책별로 어떤 업무를 맡았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당대 여성의 기록은 남성보다 현저히 적다. 그러나 이들이 수행한 업무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양 여성들은 이념적 억압 속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현명하게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 우리도 그 정신을 본받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걸어가 보자.

*지밀상궁: 조선 시대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던 상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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