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숙케치]

마음이 어지러울 때가 있다. 순간을 잘 살아가다가도 문득 과거와 불안한 미래로 오락가락할 때. 그럴 때면 꼭 없는 맥박이 뛰는 기분이 든다. 급소가 하나 늘어난 것처럼, 꼭 사랑이라도 빠진 것처럼. 어지러운 마음은 약하다.

마음이 혼란해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친구들과 지난가을부터 계획했던 여행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그맘때쯤 여행을 포기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설원이, 일본에서 만날 친구들이, 그 다정한 풍경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어차피 흔들릴 거라면 아예 일상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눈밭이 끝없이 펼쳐져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곳으로. 어지러운 마음으로 쉬운 사랑을 하러.

정갈한 골목, 네모난 블록들, 줄지어진 아름다운 가로등. 삿포로는 계획도시라서 TV 타워를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위치를 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원주민들을 몰아냈단 아픈 역사도 있다. 부서진 유빙 조각들, 깨끗하게 쌓인 눈과 윤슬. 오호츠크해 유빙선 위 풍경은 장관이었지만 기후 위기로 언젠간 볼 수 없는 풍경이 될지도 몰랐다. 도무지 단정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기치 못한 즐거움도 있었다. 삿포로 눈 축제는 고등학생 6명이 오도리 공원에 설상을 놓은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한다. 비에이의 탁신관에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예정과 달리 더 오래 머무른 사진가의 컬렉션이 남아있다. 누군들 예상이나 했을까. 이곳에선 하늘이 우중충 흐리다가도 또 예쁘게 눈이 내렸다. 가려던 곳이 문을 닫기도 하고, 하루가 계획대로 흘러가지도 않았지만 삿포로는 우연이 더 아름다운 곳이었다. 불확실해서 더 소중한 순간들.

그때쯤엔 어지러운 마음의 뿌리가 불안인지 사랑인지 잊었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은 영영 어지럽고 그렇기에 우린 아주 오래 사랑할 것이다. 혹시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겨울의 삿포로를 보러 가기를. 넘어져도 아프지 않은 곳에서, 마음껏 넘어지고 어지럽기를. 당신이 넘어진 자리엔 흔들렸던 만큼의 사랑이 남을 테니까.

아동복지 19 최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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