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뮤지컬의 성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연출가다. 지난 4월 12일(수) 소극장이 즐비한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김태형 연출가를 만났다. <히스토리 보이즈> <더 헬멧> <오펀스> 등 수많은 인기 작품은 모두 김 연출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미국 출신 고아 형제 이야기부터 대한민국 광주의 역사까지 그의 다양한 작품에 담긴 공통적인 메시지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다. 그는 “가뭄이 들어도 비가 오고 날이 좋아지면 다시 콸콸 흐르는 강물처럼 정의가 흐르길 바라요”라고 말했다. 연극으로 세상에 정의를 불어넣는 김 연출의 연출 세계로 떠나보자.

진짜 공부를 위한 선택, 연극
학창 시절 김태형 연출가는 연극을 보는 것도, 만드는 것도 즐겼다. 김 연출은 “연출을 하기 위해선 인생 최초의 연극 경험이 중요하다 생각해요”라며 “초등학교 때 관람했던 연극 속 사람들이 부러워 처음으로 연극을 하고 싶단 마음이 생겼어요”라고 말했다. 공부를 잘했던 김 연출은 이후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연극반에 들어가 연기와 연출을 배웠다. 그가 처음으로 올린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받았다. 그는 “고등학교 연극반에서의 경험이 연출이란 길을 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라며 “제가 연출한 예술로 누군가를 진짜로 울거나 웃게 하며 감동을 주는 경험은 처음이었죠”라고 말했다. 

과학고에 이어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연극을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학 동아리에서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 연출은 “동아리 활동이지만 소속감과 의무감을 느끼고 연기부터 연출까지 열심히 했어요”라며 “공연 연출을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었지만 즐겁고 행복했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김 연출은 ‘영화와 연극의 역사’란 수업을 듣고 연극을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해당 수업에선 공연을 기획하고 발표하는 활동이 이뤄졌다. 그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에 크게 감명받았다. 그는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걸 목표로 연극을 만들었지만 실패했어요”라며 “연극적 혁명엔 실패했지만 그가 만들었던 공연의 수많은 연극 기법이 현대에도 남아 있단 점에서 매력을 느꼈죠”라고 말했다. 김 연출은 브레히트를 통해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연극으로 세상을 바꾸는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얘기했다.

김 연출은 연출가의 길을 걷고자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그는 당장 닥친 시험이나 과제를 위한 공부에 회의를 느꼈다. 김 연출은 “시험에 쫓기며 하는 공부가 가짜라고 느껴졌어요”라며 “진정한 과학 지식이 쌓이는 느낌이 아니었죠”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그는 연극을 공부할 땐 처음부터 지식을 새로 채운단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연극 활동에선 진짜 무언갈 하고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혹자는 공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연극을 정말 하고 싶었죠”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한계를 넘는 연출법’
그의 이과적 성향은 연출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설득력을 기르는 데 힘을 실어줬다. 학창 시절 수학, 물리와 친했던 김 연출은 문제 풀이, 증명에 익숙했다.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이 대본을 분석하고 인물의 감정을 설명할 때 도움이 됐어요”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작품을 구상할 때 머릿속에서 체계적으로 지도를 그리고 길을 만드는 상상을 하곤 해요”라며 “한 단계씩 이야기를 점차 확장하다 보면 어느새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지죠”라고 말했다.

김 연출은 공연 제작의 모든 과정에 참여해 활동적으로 공연을 준비한다. 그는 작품 의뢰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인력을 구축한다. 무대, 조명, 의상, 분장 등 한 작품에 투입될 여러 분야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그 후엔 작품의 방향성을 고민한다. 유기적이고 전체적인 통찰이 필요한 단계다. 그는 “공연에서 어떤 화두를 던질 건지, 관객들이 어떤 것을 고민하게끔 할 것인지 고려해요”라고 말했다. 극의 방향성이 정해지면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간다. 연습 과정에서 김 연출은 배우만큼 열성적으로 연기 시범을 보인다. 그는 “연습실에서도 무대만큼의 에너지를 내며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연출의 일이에요”라며 “배우들과 극 중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 행동을 상상해 보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대사의 의미를 고민하고 연기 방식을 제안하죠”라고 말했다.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의 무대 도면이다. (출처=아이엠컬처)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의 무대 도면이다. (출처=아이엠컬처)

김 연출은 무대와 객석 간 경계를 허문 색다른 구성으로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벙커 트릴로지> <카포네 트릴로지> <더 헬멧> 등은 무대 공간을 이분할 하거나 객석을 마주 보게 하는 등 독특한 구성을 보여줬다. 그는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직접 전달하고 싶었어요”라며 “기존 공연이 가진 정형화된 질서를 없애고 관객과의 경계를 과감하게 없애고자 다양한 시도를 했죠”라고 설명했다. <카포네 트릴로지>는 그가 이머시브(Immersive) 연극(지난 숙대신보 제1417호 ‘이머시브 연극, 관객을 무대로 흡수하다’ 기사 참고)을 시도한 첫 작품이다. 호텔 방에서 벌어진 살인 이야기를 다룬 해당 연극은 사방이 벽으로 막힌 작은 곳에서 펼쳐졌다. 좁은 공간에서의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극을 만드는 느낌을 자아냈다. <더 헬멧>은 가운데 가벽을 세워 무대를 ‘빅룸’과 ‘스몰룸’으로 나누는 방법을 시도했다. 벽이 닫히면 빅룸과 스몰룸에서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열리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이다. 그는 “색다른 무대 구성으로 관객들이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죠”라고 답했다. 공연과 일상 공간을 하나로 합친 형태의 극도 있다. 그가 연출한 <커피 플레이>는 일반 극장이 아닌 실제 카페에서 공연됐다. 김 연출은 “객석과 무대 간 거리를 좁혀 관객이 극 속 인물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처럼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12일(수)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김태형 연출가가 연극 '오펀스'의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4월 12일(수)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김태형 연출가가 연극 '오펀스'의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여성 배우 세 명이 출연하는 김태형 연출가의 연극 '오펀스'의 포스터다. (출처=레드앤블루)
▲ 여성 배우 세 명이 출연하는 김태형 연출가의 연극 '오펀스'의 포스터다. (출처=레드앤블루)
▲ 여성 배우 세 명이 출연하는 김태형 연출가의 연극 '오펀스'의 포스터다. (출처=레드앤블루)
▲ 여성 배우 세 명이 출연하는 김태형 연출가의 연극 '오펀스'의 포스터다. (출처=레드앤블루)

여성학에 관심이 많던 김 연출은 젠더 프리(Gender-Free) 캐스팅으로 공연을 만들었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오펀스>는 캐스팅에 성별 제한을 두지 않는 젠더 프리 연극이다. 특히 <오펀스>가 젠더 프리로 공연되는 것은 세계 최초의 시도다. 원작엔 남성 배우 세 명만 출연하지만 김 연출은 여성 배우도 캐스팅했다. 원작자가 젠더 프리 캐스팅을 거부하자 김 연출은 원작자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여성 배우를 캐스팅해야 하는 이유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승낙을 받아낸 그는 세 명의 여성 배우가 출연하는 새로운 <오펀스>를 만들었다. 그는 “능력 있는 여성 배우들이 울거나 웃고, 화도 내면서 온갖 감정을 표현하는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답했다. 김 연출은 <오펀스>에 여성 캐릭터가 남장을 하고 살고 있단 설정을 추가했다. 해당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자신이 약자란 사회적 관념에 저항하며 과장되게 소매치기와 강도질을 한다. 그는 “여성 배우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연기를 할 때 남성 배우들보다 훨씬 더 슬프고 아프게 느껴졌어요”라며 “이 느낌을 극장에 함께 있는 수많은 딸들에게 주고 싶었죠”라고 말했다. 

“불안함과 재미는 제 창작 동기죠”
‘흥미’와 ‘정의’는 김 연출이 연출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다. 그는 공연 예술의 본질인 관객의 흥미와 소수자를 조명하는 극으로서의 기능, 두 가지를 늘 고민한다. 김 연출은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못되고 나쁜 이야기는 만들 수 없어요”라며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극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연출한 <더 헬멧>은 1987년의 광주, <빵야>는 일제강점기부터 제주 4·3 사건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그는 역사를 무대로 재현할 때 정직하고 솔직하게 연출한다. 김 연출은 “많은 사료를 들여다보고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해요”라며 “관객들이 연극을 보고 집에 가서 아픈 역사를 한 번 더 찾아볼 수 있길 바라죠”라고 말했다.

자신을 ‘워커 홀릭’이라고 소개한 그는 ‘불안’과 ‘재미’를 동력으로 다양한 연극적 시도를 이어 나갈 예정이다. 김 연출은 1년에 8개에서 10개가량의 작품에 참여한다. 지난해엔 뮤지컬 <리지> <비더슈탄트> <아몬드> <팬레터>와 창작가무극 <금란방>, 연극 <더 헬멧> <오펀스> <히스토리 보이즈>까지 총 8개의 공연을 올렸다. 김 연출은 “연출가는 프리랜서라 일이 끊기면 은퇴해야 해요”라며 “지금 맡은 연출을 잘해야 한단 불안과 연극을 잘 올렸을 때 느끼는 기쁨으로 일하죠”라고 답했다. 이머시브 연극에도 계속해서 도전할 계획이다. 이머시브 연극은 건물 전체를 공연장으로 사용하거나 무대 규모가 큰 경우가 많아 수익 구조를 맞추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이머시브 연극이 충분히 상업적으로 가치 있다고 믿어요”라며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좋은 이머시브 연극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연출가를 희망하는 학우들에게 건넨 김 연출의 첫 마디는 ‘하지 마세요’였다. 꿈을 위해서라면 견디고 버틸 각오가 필요하단 것이 그의 조언이다. 김 연출은 “연출가는 소수만 살아남는 직업이에요”라며 연출가를 꿈꾸는 학우들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일을 하다 보면 그 어떤 일로도 보상되지 않는 사랑스러운 순간이 찾아와요”라며 “나 또한 그런 순간들 덕분에 연출 일을 평생 할 생각이에요”라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마워, 내 이야기 들어줘서.’ 지난 2월 26일(일)까지 공연된 김태형 연출가의 연극 <빵야> 속 대사다. 김 연출의 극 속 인물들은 대부분 약자다. 그가 귀 기울인 소수자의 이야기에 관객들은 자신을 대입해 현실을 마주하기도, 희망을 찾기도 한다. 김 연출은 “제 작품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는 씨앗이 됐으면 좋겠어요”라며 “더 좋은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정의를 이야기하는 연극을 만들어나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스쳐간 캐릭터들이 더 많은 이에게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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