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름을 추구하는 시대다. 새로 산 신발, 신축 아파트, 화려한 옷⋯⋯ 세상엔 온갖 새것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이를 추종한다. 그러나 여기, 시대 흐름을 거슬러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이가 있다. 녹사평역 10분 거리 이태원 골목길에서 53년 넘게 수제화를 만드는 박대섭 장인이다. 그의 가게 이름은 장인의 성을 본뜬 ‘슈즈박’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방탄소년단, 소녀시대, 빅뱅 등 수많은 연예인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미국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의 신발부터 방탄소년단의 신발까지 제작한 일명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노 프라블럼은 그의 손이 닿으면 불가능은 없단 뜻으로 손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이 담긴 그의 가게엔 오랜 세월 자신만의 철학을 지켜온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서울 이태원 골목 슈즈박 본점 앞에서 박대섭 장인이 당당한 자세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나만의 구두가 태어나는 곳
올해로 72세인 그는 스무 살부터 구두 장인의 길을 걸었다. 처음엔 구두 제작 기술이 없어 국내 유명 구두 디자이너 유노욱 장인을 따라 명동에서 영업 일을 했다. 그는 “그땐 봉급이란 개념이 없었어요”라며 “1년 동안 용돈 수준의 적은 돈만 받으며 일을 배워야 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영업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나자 그는 7명의 직원 중 실적 1등을 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박 장인은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손님들이 찾아왔어요”라며 “그땐 몰랐지만, 장사가 적성에 맞았던 거죠”라고 말했다. 1970년 말 서울 무교동에 코오롱빌딩이 생기면서 그는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이후 박 장인은 몇 년간 경험을 쌓은 뒤 새로운 출발을 위해 1982년 이태원으로 왔다. 그는 “이태원에서 장사하니 영어도 많이 늘었어요”라며 “영어를 한국말처럼 쓰다 보니 외국인 손님도 점점 많아졌죠”라고 말했다. 

박 장인의 신발은 점차 미국인의 입소문을 탔다. 뱀장어 가죽으로 만든 부츠가 인기의 첫 시작이었다. 그는 “미국에선 뱀장어 부츠가 굉장히 비싼데 우리 가게에선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판매했어요”라며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여기저기 주문이 들어왔죠”라고 말했다. 미국 손님 중 일부는 그에게 신발 수출을 제안했다. 박 장인은 제안을 받아들여 한 번에 40켤레가 넘는 수출용 신발을 만들기도 했다. 박 장인은 “당시 손님이 예쁜 신발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커다란 양주를 선물했어요”라며 회상했다. 

▲튼튼한 수제화의 비결을 공유하고 있는 장인의 모습이다.

박 장인의 전성기는 ‘카우보이 부츠’로 시작됐다. 일명 카우보이 부츠라 불리는 웨스턴 부츠는 하루에 백여 개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90년대에 마카레나 춤이 유행하면서 방송에서 너도나도 카우보이 부츠를 신었어요”라며 “그때부터 카우보이 부츠가 대박이 나기 시작했죠”라고 설명했다. 카우보이 부츠는 당시 ‘슈즈박이 아니면 안 돼’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사람들이 부츠를 사기 위해 가게 앞에서 줄을 서 있었다. 인기에 힘입어 서울 강남구에 있는 갤러리아 백화점 입점을 제안받기도 했다. 박 장인은 “백화점 앞에 ‘슈즈박 입점’이라 쓰인 현수막이 크게 걸렸어요”라며 “유명 연예인에게 동업을 제안받기도 했죠”라고 말했다. 


한 켤레라도 ‘멋스럽게’
그가 만든 카우보이 부츠엔 특별한 비밀이 담겨 있다. 길이를 늘여 멋을 낸 카우보이 부츠는 ‘태가 나는 모양’이 생명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카우보이 부츠는 폭이 넓었다. 그러나 그는 멋을 살리기 위해 폭을 좁혀 부츠를 차별화했다. 박 장인은 “미국 손님들이 ‘미스터 박, 부츠에 발이 편하게 쑥 들어가면 잘못된 거야, 모양이 안 난다고’라 얘기했어요”라며 “손님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카우보이 부츠에 특별한 디자인을 가미한 것이 인기의 비결이죠”라고 설명했다. 

▲장인이 손수 제작한 부츠들이 진열된 모습이다. 독특한 무늬를 가진 형형색색의 부츠들이 각각의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

가게 안을 둘러보면 여러 유명 인사의 흔적을 구경할 수 있다. 가게 앞 전시된 노란 롱부츠는 아이돌그룹 마마무의 화사가 의뢰한 것이다.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서면 미국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의 사인이 적힌 사진이 보인다. 1993년 내한 당시 빌 클린턴이 신발을 주문한 뒤 감사의 의미로 보낸 것이다. 케이팝의 역사를 쓴 원더걸스,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 유명 아이돌의 신발도 엿볼 수 있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부츠도 있었다. 일본의 한 프로레슬링 선수가 의뢰한 부츠는 코로나19로 인해 배송되지 못하고 가게 한편에 보관 중이다. 

▲영국, 일본에 수출하는 신발에 찍히는 슈즈박 고유의 라벨이다. 
▲영국, 일본에 수출하는 신발에 찍히는 슈즈박 고유의 라벨이다. 

그가 등록한 구두 디자인 특허는 무려 12개다. 처음으로 특허를 낸 구두는 국내 1세대 디자이너 진태옥 디자이너를 위해 제작한 것이다. 당시 진태옥 디자이너는 박 장인의 구두를 신고 파리 패션쇼에 참가했다. 그는 “12개의 특허 중 2~3개가 대한민국을 휩쓴 디자인이에요”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영국과 일본에도 박 장인의 독특한 디자인이 소문나 있다. 그가 수출하는 모든 신발엔 슈즈박 고유의 라벨이 찍힌다. 박 장인은 “신발 한 켤레에 100만 원을 받기도 해요”라며 “해외에선 유명 브랜드보다 더 비싸게 받는 일도 있죠”라며 인기를 자랑했다.


장인은 철학을 신는다
수제화는 백 퍼센트 장인의 손길을 거친다. 수제화는 제작 방법이 까다로워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만들기 어렵다. 그는 “제 구두 제작을 도와주시는 분들 모두 연로하신 장인 분들이에요”라며 “한땀 한땀 꿰매가며 신발을 완성하죠”라고 설명했다. 슈즈박의 신발은 고객의 종아리 형태를 본떠 제작된다. 신발을 만들기 전, 종이에 발을 올려놓고 직접 수치를 재는 과정을 거친다. 신기 편한 수제화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다. 그는 “구두 제작은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요”라며 “보통은 10년, 빠르면 5년은 배워야 비로소 돈을 벌 수 있죠”라며 구두 제작의 어려움을 표현했다. 

▲신발을 제작할 때 고려하는 길이와 폭을 설명하고 있는 장인의 모습이다. 진지한 그의 모습에서 신발을 향한 진심이 느껴진다. 
▲신발을 제작할 때 고려하는 길이와 폭을 설명하고 있는 장인의 모습이다. 진지한 그의 모습에서 신발을 향한 진심이 느껴진다. 

그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만든다’라는 철학을 고수한다. 슈즈박엔 단골손님들이 많다. 입소문으로 시작된 인기를 ‘신뢰’로 굳혀왔기 때문이다. 그는 손님이 맘에 들지 않으면 신발을 다시 만든다. 이는 해외 패션디자이너, 유명 연예인부터 일반 손님까지 예외는 아니다. 박 장인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신발을 만들고 싶어요”라며 “스스로가 봐도 멋있다고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만들죠”라고 말했다. 그는 뮤지컬 ‘킹키부츠’의 부츠를 만들었던 순간을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한 켤레를 제작하는 데에만 열흘이 걸렸기 때문이다. 박 장인은 “마흔 켤레의 신발을 40일에 걸쳐 만들었어요”라며 “한 학생이 집에 모셔두고 싶다고 따로 제작을 의뢰할 정도로 예술적인 신발이었죠”라고 웃음 지었다. 

박 장인은 장인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그는 성실한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현대 사회의 쉽게 시작하고 쉽게 포기하는 세태를 우려했다. 박 장인은 자신이 잘하는 영업 업무와 구두 제작 기술로 53년을 꾸준히 정진해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끈기 있게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아요”라며 “우리나라도 근 십 년 후면 장인이 없어질까 걱정돼요”라고 말했다. 로봇으로 인한 자동화도 장인의 소멸을 부추긴다. 그는 “수제화를 기계로 완전히 대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젊은이들에게 요령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 것을 당부했다. 박 장인은 “일을 할 때 시간을 대충 보내거나 꾀를 부리면 안 돼요”라며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박대섭 장인에게 신발은 ‘삶’이다. 그는 주문이 들어오면 고민으로 잠을 설칠 정도로 구두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다. 슈즈박이란 칭호는 그에게 있어 ‘자존심’과 같다. 오랜 시간과 함께 축적돼 온 그의 신발엔 명품도 따라 할 수 없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본 적 있는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쌓아온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정답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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