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달을 맞아 본교 곳곳이 분주하다. 최근 교내엔 ‘실천과 전진’이란 키워드로 ‘숙명 여성 영화제: WAVE’, 송진챌린지, ‘TEAM SHARK’ 강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페미니즘이 일상으로 자리 잡은 본교와 달리 아직 사회엔 여성 차별이 팽배한다. 한국 사회에선 여성 대상 성범죄가 계속 일어나고 페미니즘이 남성 혐오 사상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부당한 상황에서도 계속 목소리 내는 여성들은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여성들이 지치지 않고 페미니즘에 주목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선 국내 페미니즘의 시작과 발전 과정부터 짚어봐야 한다.


성차별 일깨웠지만 때론 지치기도
국내 페미니즘(Feminism)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당시 활동한 여성 단체 ‘근우회’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강연하는 등 여성이 교육받을 기회를 마련했다. 이후 1970년대 들어 이화여대에 국내 최초 여성학 강의가 개설됐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엔 여성 노동자 차별과 직장 내 성폭행 등 다양한 여성 차별 문제가 제기됐다. 2000년대엔 여성가족부가 설립돼가 설립돼 성매매 방지법을 추진하고 여성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영유아 보육 정책을 마련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맞춰 대학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도 등장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페미니즘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더 많은 여성이 사회가 성차별적이란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2015년 한 남성이 공용화장실에서 초면의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국내 페미니즘이 활성화된 계기 중 하나다. 여성들은 해당 사건으로 여성혐오가 개인의 안위까지 위협할 수 있단 인식을 갖게 됐다. 이는 여성 차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한 여성이 일생 경험한 혐오를 담은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해당 도서는 2016년 10월 출간 이래 약 2년 만에 국내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넘기며 화제를 모았다. 본교 이화영 기초교양대학 교수는 “2015년부터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 현상은 여성들이 차별을 자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부 여성들은 페미니즘 담론 자체를 피로하게 느끼기도 한다. 지난해 조선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진행한 ‘대한민국 젠더의식 조사’에 따르면 16세 이상 남녀 1786명 중 49.8%(약 889명)가 ‘페미니즘에 대한 느낌이 어떻냐’는 질문에 ‘과거엔 긍정적으로 느꼈으나, 이제는 피로감이 들어 관심이 줄었다’고 답했다. 피로감을 느낀단 응답은 여성이 53.2%로 남성 46.4%보다 높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우는 “어차피 사회는 바뀌지 않으니 페미니즘 주장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막막하다”며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숙제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민 사회심리학과 초빙대우교수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과정엔 갈등이 불가피하다”며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 본인이 피로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느낌이 어떻냐'는 질문에 '과거에는 긍정적으로 느꼈으나, 이제는 피로감이 들어 관심이 줄었다'고 답한 비율을 나타낸 그래프다.
▲'페미니즘에 대한 느낌이 어떻냐'는 질문에 '과거에는 긍정적으로 느꼈으나, 이제는 피로감이 들어 관심이 줄었다'고 답한 비율을 나타낸 그래프다.


변화 없는 사회, 실망하는 여성들
성차별적 현실이 변하지 않을 때 여성은 피로를 느끼게 된다. 2015년 이후 여성들은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시위, 미투(Me Too) 운동, 문단 내 성폭력 폭로 등 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고자 노력했다. 2018년엔 약 30만 명의 여성이 모여 남성과 평등한 권리 확보를 주장하는 혜화역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서울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에 접수된 스토킹 신고 수는 4992건으로 2018년 하반기 897건에 비해 5.5배 증가했다. 데이트 성폭력 신고 수도 같은 기간 3173건에서 9865건으로 약 3배 증가했다. 2018년엔 ‘N번방’과 같은 온라인 성 착취 사건까지 등장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우는 “성 추문으로 4년간 잠적했던 고은 시인이 올해 복귀한 것처럼 피해자가 부당함을 고발하더라도 좌절되는 경우를 자주 봤다”며 “목소리를 내야 할 일이 생길 때 용기 있게 행동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2022년 상반기에 접수된 스토킹 신고 수를 나타낸 그래프다.
▲지난 2022년 상반기에 접수된 스토킹 신고 수를 나타낸 그래프다.


젠더 백래시(Gender Backlash) 현상도 피로를 유발하는 요소 중 하나다. 백래시란 어떤 행동 또는 물체에 대한 강한 반동을 뜻한다. 국내 젠더 백래시는 개인의 일은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단 ‘능력주의’에 힘입어 반페미니즘 형태로 등장했다. 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이 겪는 차별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며 사회가 개선해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여성주의자 수잔 팔루디(Susan Faludi)는 그의 저서 『백래시』에서 ‘페미니즘의 힘이 셀수록 반격은 더 촘촘하게 문화에 스며든다’고 언급했다. 그는 여성운동이 지속되는 이상 백래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도 덧붙였다. 국내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백래시 사건엔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사업 항의’가 있다. 2021년 서울시자살예방센터는 20대 여성 자살 예방 프로그램 ‘시스터즈 키퍼스(Sisters Keepers)’를 운영했다. 이후 해당 센터 홈페이지엔 ‘시스터즈 키퍼스가 남성 자살률을 고려하지 않아서 차별적이다’란 내용의 비방글이 약 800개 올라왔다. 한 초빙대우교수는 “여성 의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은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돼 여성의 피로감을 부추기기도 한다. 지난 대선 당시 후보자였던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가족부 폐지, 성폭력 무고죄 적용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페미니즘에 반감을 지닌 이들의 표심을 공략했다. 김경영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은 SNS에서 ‘윤 후보의 배우자가 임신 및 출산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공격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해당 발언엔 기혼 여성의 임신 및 출산 경험이 당연하단 여성혐오 정서가 깔려있다. 지난해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을 포함한 42개 시민단체는 ‘페미니스트 주권자 행동’ 집회에서 차별과 혐오로 정당성을 얻는 정치권력을 비판하며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요구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우는 “스페인의 여성 할당제 시행과 일본의 비동의 간음죄 입법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발전이 더디다”고 말했다.

그래도 다시 한번 ‘페미니즘’
여성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여성 간 연대와 믿음으로 타파할 수 있다. 뉴질랜드 여성들은 참정권 획득을 위해 5년이란 시간 동안 투쟁했다. 뉴질랜드의 여성 운동가 케이트 셰퍼드는 1988년 참정권 보장 청원이 거절당하자 서명운동을 벌였다. 청원서엔 1891년엔 9000명, 1892년엔 2만 명, 1893년엔 3만 2천 명의 여성이 서명했다. 많은 여성의 지지로 1893년 뉴질랜드는 법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가 됐다. 이처럼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성 연대는 성평등을 실현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교수는 “연대의 경험을 통해 여성 스스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우는 “페미니즘에 싫증을 느끼는 여성이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기다려줘야 한다”며 “그것만으로도 여성 간의 연대는 실현된다”고 말했다.

여성 지원 정책은 현실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다. 여성가족부에선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피해자 지원 센터를 운영한다. 해당 센터에선 피해자 상담과 사건 수사를 지원하고 피해영상물을 삭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여성할당제는 과거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구조적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추진됐다. 이는 오늘날 여성 비례대표 할당제, 여성 임원 할당제, 국공립대 여성 교수 할당제 등의 형태로 운영된다. 해당 제도로 제1대 국회엔 0.5%였던 여성 의원의 비율이 19대에 이르러 51.8%로 증가했다. 


많은 여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회엔 여성혐오와 차별이 만연하다. 모두의 일상에 스며든 차별은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삶의 일부가 됐다. 일상이 된 차별은 때론 우릴 지치게 한다. 그러나 피로를 이겨내고 변화를 이끌기 위해선 서로에게 공감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여성들이 맞잡은 손은 세상을 바꾸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모두가 성평등을 누리는 그날이 올 때까지 ‘세상을 이끄는 부드러운 힘’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자.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 지난 2015년부터 국내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대중화 흐름임.

참고문헌
백미연. (2019). 한국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 정치의 전환: ‘연대의 정치’를 향하여. 정치사상연구, 25(2), 68-92.
김민정. (2019). 한국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확대를 위한 여성할당제의 효과. 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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