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숙케치

지난 2019년 친구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생애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횡단 열차에서 일몰을 보고 있을 때였다. 중간역에서 자리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탑승했다. 차려입었지만 어쩐지 추레한 차림이었다. 자세히 보니 김일성 배지를 차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말로 자리 주인이냐 여쭤보니 “어떻게 조선어를 할 줄 아냐, 남쪽 사람이냐”고 되물었다. 아저씨는 함께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며 “이틀을 더 가야 하는데 말동무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60년 분단의 세월은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추리’를 권했다. ‘무슨 수수께끼라도 내려는 걸까?’ 싶은 찰나, 아저씨가 가방에서 자두를 꺼냈다. “남쪽에는 추리도 없나?” “아, 자두. 저희는 자두라고 불러요” “자두? 추리를 왜 추리라고 안 하는 거야? 조선말 배운 적 없어?” 북한보다 외래어가 많은 한국말을 알아듣기 힘들었는지, “너희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외국어 하는 건 아니지?”라고도 하셨다.

밤이 되자 컵라면을 먹으려던 우리에게 아저씨가 컵라면 바꿔 먹기를 제안했다. ‘즉석 국수’라고 쓰여있는 북한 컵라면 맛은 슴슴했다. 싱거운 물냉면에 다대기를 넣은 맛이 났다. 라면을 먹으며 아저씨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배낭여행을 올 생각을 다 하고, 숙성됐구나야”. 성숙하단 뜻인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아저씨는 캐리어를 들어주면서 기차 밖으로 배웅을 나왔다. 우리에겐 첫 북한 사람과의 대화, 아저씨에겐 첫 남한 사람과의 대화였다. 서로에 대해 잘못 알던 것도 많았지만 기차 안에선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어도 내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다. 이번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도 여행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을 다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이 ‘숙성되는’ 기분이다. 인생이란 여행 안에서 어제보다 ‘숙성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사회심리 19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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