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지난달 필자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연세가 많으셨고 폐렴도 있으셨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다. 다만 그날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할머니의 이장일이었다. 이장일 오전 필자는 학교로, 부모님은 할머니 산소로 향했다. 오후3시 경 어머니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는 할머니 유골을 화장하던 중 할아버지가 위독하단 소식을 접했다. 당황하던 짧은 몇 분 사이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이장을 위해 지방에 내려가신 부모님께서 병원에 도착하기까진 3시간이 걸렸다. 유일하게 서울에 있던 필자가 제일 먼저 병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와 필자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필자는 관계를 회복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할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들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할아버지와의 관계엔 미움 그 이상의 증오만이 남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옆에 앉아있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인지. 할아버지, 이렇게 될 걸 알고 계셨어요?” 하고 속으로 말했다. 필자는 할아버지께 먼저 말을 건넨 적이 없다. 할아버지와 대화한단 생각조차 어색했다. 부모님이 오시기까지 3시간을 할아버지 곁에 앉아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 중 가장 긴 시간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신 아버지는 제대로 감기지 못한 할아버지의 눈을 지그시 눌렀다. “뭐가 그리 급하셨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이신 아버지와 눈시울이 붉어진 어머니를 보니 속에서 무언가 솟아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필자는 어머니와 집에서 필요한 물품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지도사는 장례 일정을 설명했다. 장례식장에서 맞는 첫날 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새어 나왔다.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6시엔 입관식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환자복이 아닌 수의를 입고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병원에서의 모습보다 더 창백한 얼굴이었다. 장례지도사는 손을 따뜻하게 해 고인에게 온기를 전하라고 했다. 입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할아버지 곁을 돌았다. 가장 먼저 아버지가 그다음엔 오빠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필자는 하지 못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악수조차도 어색한 사이에 얼굴을 만지는 행동을 할 순 없었다. 다들 눈물을 보이던 그 순간에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외삼촌은 필자와 오빠에게 “입관식 때 뭘 느꼈어?”라고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오빠는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곤 필자가 첫날 밤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됐다. 필자는 눈물을 흘리며 “할아버지에게 미안하단 말을 듣지 못해서 너무 슬퍼”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픈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필자의 미움과 증오는 그에게 사과받고 싶던 바람이었단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필자의 슬픔은 할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영원히 치유될 수 없단 슬픔이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필자만을 위한 슬픔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넘었다. 장례식은 끝났지만 감정은 정리되지 못했다. 미안함, 분노, 허무함이 뒤섞여 종종 눈물이 난다. 흐르는 시간 속 필자의 마음은 아직도 그날에 매여있다. 그날의 뒤엉킨 감정을 되돌아보면 울컥해진다. 하루빨리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무뎌지길 간절히 바란다.

법 22 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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