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놉티콘(panopticon)은 그리스어로 ‘모두’라는 뜻의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이 합쳐진 단어다. 파놉티콘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교도소의 형태다.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를 파놉티콘에 실현하고자 했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실현을 목적으로 처벌을 허용한다.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공리주의엔 특정 다수에게 이득이 몰리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파놉티콘 속에서 다수로 존재하는 죄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파놉티콘 속에서 죄수는 다수임에도 고통을 받는다.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창시자인 벤담이 고려하지 않은 파놉티콘의 모순을 짚어내고 공리주의의 한계를 비판해보자.

사회가 용인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자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감옥에 갇힐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며 벤담의 신념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그가 파놉티콘에 갇힌다면 말이 달라진다. 파놉티콘은 최소 인력으로 최대 감시 효과를 이끌어낸다. 파놉티콘 안에선 시선의 비대칭이 발생한다. 다수의 죄수는 정신적 지배를 받고 소수의 간수는 그들을 감시한다. 벤담은 범죄자가 고통받을지라도 자신의 희생으로 다수의 행복이 보장된다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벤담의 사상에 '다수의 고통'이란 모순이 생긴 것이다.

프랑스 의회는 파놉티콘을 만들자는 벤담의 제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필자는 그 이유를 죄수를 관리하는 ‘의회 속 다수’의 편리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의회가 자신을 권위자, 다수라고 여겨 소수의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다수와 소수에 대한 관점은 현대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지난 2020년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확진자는 개인정보가 공개되고 사회에서 비판받았다. 같은 해 2월 대구에 위치한 신천지 교회에선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일어났다.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은 대구 폐쇄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코로나19 확진자는 사회에서 비판받지 않는다. 다수의 비감염자가 자신도 소수집단인 확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선 소수를 해쳐도 된다’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공리주의를 믿는 이들은 자신이 소수가 될 거라는 가정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익을 좇아 혐오와 방관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 프랑스 의회와 똑같다. 우리는 소수를 위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우월한 다수가 되기도 하고, 소수가 되기도 한다. 다수에 휩쓸려 행한 일들이 소수에게 어떠한 형태의 공격으로 다가갈지 생각해야 한다. 본인이 겨눈 화살은 기필코 다시 돌아와 심장에 꽂힐 것이다. 서로 감시하는 사회가 아닌 신뢰하는 사회가 도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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