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타버스(Metaverse) 플랫폼 ‘제페토(Zepeto)’에서 이용자들이 서로 채팅을 나누고 있다.

'19세가 되면 결혼한다’ ‘이 시간부터 우리는 서로의 소유물이다’. 한 메타버스(Metaverse) 플랫폼에서 만난 38세 남성의 요구로 11세 여아가 작성한 결혼서약서의 일부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모두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 피해자는 지난 2월 14일(월) 캐나다 경찰과 한국 경찰에 각각 신고했다. 캐나다 경찰은 신고 당일 사건 조사에 착수하고 피해자의 안전을 도모했다. 반면 한국 경찰은 신속한 수사보단 피해자 가족에 피해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요구했다. 해당 사례는 가상공간 성범죄에 인식이 미비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드러낸다. 최근 우리나라에선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를 이용해 상대 아바타를 스토킹하거나 희롱하는 등의 성범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본지 기자는 메타버스 성범죄의 현주소를 분석하고자 직접 메타버스 현장에 들어가 봤다.
 

왜 성범죄에 취약할까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을 뜻하는 ‘Meta’와 ‘우주’를 뜻하는 ‘Universe’의 합성어로 아바타를 매개로 사회문화적 활동이 가능한 3차원 세계를 뜻한다. 메타버스에선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Avatar)가 착용할 옷과 장신구를 직접 만들고 다른 이용자의 아바타와 소통할 수 있다. 이용자들은 자신의 아바타가 노래에 맞춰 유행하는 춤을 추게 하거나 실시간 방송을 통해 아바타를 홍보하기도 한다. 이러한 메타버스 환경을 제공하는 플랫폼엔 ‘제페토(Zepeto)’ ‘로블록스(Roblox)’ 등이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메타버스 공간이 확대되며 해당 공간을 이용하는 여성들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쉽다고 분석한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를 메타버스 성범죄라 한다. 다른 사람의 아바타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거나 타인의 아바타를 스토킹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가상 세계에선 현실 세계의 젠더 권력이 그대로 반영된다.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디지털 성범죄 발생 건수는 4349건으로 지난 2019년 2698건에 비해 약 61% 증가했다.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에 상담을 요청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의 약 74%가 여성으로 집계됐다. 

특히 아동·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메타버스 성범죄에 취약하다. 지난 2021년 닐슨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제페토 이용자의 50.4%, 로블록스 이용자의 49.4%가 만 7~12세였다. 성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자아가 온전히 형성되지 못한 아동·청소년들은 온라인과 현실의 자아를 분리하지 못해 아바타를 곧 본인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메타버스 내에서 성범죄 피해를 입을 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어 이석원 자주스쿨 대표는 “본인의 아바타가 성범죄를 당했을 때 아바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아동·청소년 사례가 많았다”고 말했다.

특히 메타버스 공간은 ‘그루밍(Grooming) 범죄’의 위험에 노출돼있다. ‘길들이다’는 뜻의‘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신뢰 관계를 형성한 후 성적 노예 혹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한단 뜻의 범죄 용어다. 이 대표는 “그루밍 범죄는 메타버스와 같은 온라인 가상 세계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했다. 일례로 지난달 한 메타버스 플랫폼에선 한 남성이 피해자에게 아이템을 주겠다며 친근하게 접근해 관계를 이어가다 몸 사진을 요구한 사건이 있었다. 메타버스에선 상대방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어 가해자가 피해자를 속이기 쉽다. 김 대표는 “온라인 그루밍 범죄의 주요 대상이 되는 아동·청소년은 자신이 피해를 받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 메타버스(Metaverse) 플랫폼 ‘제페토(Zepeto)’에 존재하는 가상클럽의 모습이다.

메타버스 관찰일지
본지 기자는 메타버스 내 성인지 실태를 분석하기 위해 지난 16일(화)부터 지난 23일(화)까지 한 메타버스 플랫폼을 직접 체험해 봤다. 관찰 결과 ▶연령 제한 없이 공개되는 성인 콘텐츠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교육 부재 ▶인정 욕구의 유일한 해소처로 사용되는 가상 공간 이 메타버스 내 성범죄 증가의 주된 원인이었다.

관찰 결과 해당 플랫폼에선 누구나 성인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었다. 플랫폼엔 가상 클럽과 소위 ‘헌팅(Hunting)’을 목적으로 한 가상 공간이 존재했다. 13세 이상 이용가인 플랫폼 ‘VRchat’은 유흥 업소의 일종인 ‘스트립 클럽(Strip Club)’을 모방한 가상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메타버스 플랫폼에선 아동·청소년 이용자에 대한 고려 없이 성인 콘텐츠가 무방비하게 공개되고 있었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부 이용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해당 플랫폼에선 이용자가 실제 나이를 공개하고 아바타끼리 연애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관찰됐다. 한 아바타가 자신과 연애 중인 아바타에게 ‘사랑한다’ ‘보고 싶다’ 등의 채팅을 반복적으로 전송하기도 했다. 김 대표는 “가상 세계의 아바타와 현실의 이용자 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며 “이용자가 아바타를 인격체로 여기고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들은 사회적 미의 기준에 부합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아동·청소년은 가상 공간에 지속해서 노출되면 외모에 대한 편향된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 해당 플랫폼의 아바타들은 얼굴이 과도하게 작고 다리는 지나치게 길었다. 이 대표는 “메타버스의 주 이용층인 아동·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외모에 대한 미성숙한 인식을 지닌 경우가 많다”며 “멋진 외모로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심리가 메타버스 속 아바타에 반영된다”고 설명했다.
 

▲메타버스(Metaverse) 플랫폼 제페토(Zepeto)’에서 한 이용자가 아바타의 모습으로 실시간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메타버스(Metaverse) 플랫폼 제페토(Zepeto)’에서 한 이용자가 아바타의 모습으로 실시간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성범죄에 무너지는 가상 세계, 처벌할 수 없을까
메타버스 플랫폼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성범죄 가해자의 이용을 제한하거나 피해자를 보호하긴 어렵다. 성범죄 피해자는 가해자의 계정을 차단하거나 플랫폼 측으로 신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가해자는 음성 채팅 시 발언이 제한되거나 계정 영구 정지 등의 징계를 받는 수준에 그친다. 플랫폼 측에 신고했더라도 피해자가 처리 경위를 자세히 알기 어렵단 한계도 존재한다. 가해자가 새롭게 계정을 생성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제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임선영 메타버스 플랫폼 ‘이프랜드’ 관계자는 “메타버스 내 성희롱 범죄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며 “메타버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범죄 및 부작용에 대응 가능한 관리 체계를 마련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박채윤(독일언어문화 22) 학우 또한 “메타버스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은 계정 생성에 제한을 두는 등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메타버스 내의 성범죄 가해자를 형사 처벌하기 어렵다.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제13조’에선 통신매체를 이용해 상대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말, 음향, 그림 등을 보낼 경우 처벌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법률은 일부 디지털 성범죄만 포함될 뿐 메타버스 내의 아바타 간 성행위까지는 포괄하지 못한다.‘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이용음란죄’가 존재하지만 가상 세계의 유사성행위에 해당 조항을 적용 순 없다. 본교 이욱한 법학부 교수는 “가상 세계에선 물리적 피해 수준을 논할 수 없어 처벌 규정을 신설하기 어렵다”며 “이용자들이 가상 공간에서 안전할 수 있도록 메타버스 플랫폼 제공자가 내부 규제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메타버스 성범죄는 점점 더 교묘해져 가상 세계에서 일어나는 범죄와 실제 범죄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미 가상 세계에서 감각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기술이 구현됐다. 지난달 영국의 ‘퓨처 랩(Future Lab)’ 전시회에선 아바타가 받는 자극이 이용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전신 햅틱 수트(Haptic Suit)’가 시연됐다. 메타버스에서의 물리적 접촉이 가능해지면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성범죄가 실제 범죄와 유사해진다.
 

현재 메타버스 성범죄를 예방할 방법은 개개인의 인식 변화를 위한 교육뿐이다. 아동·청소년이 플랫폼에서 범죄에 노출됐을 때 확실한 신고와 처벌이 가능하도록 인식 개선 교육이 필요하다. 이석원 자주스쿨 대표는 “성교육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와 건강한 성 인식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민영 자주스쿨 대표는 "아동·청소년이 메타버스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른의 의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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