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문화]

“다음에 일어날 일은 나한테 달렸어. 다음에 일어날 일은 당신한테 달려 있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진짜 결말 같은 건 없으니까.”

 연극 <마우스피스>의 주인공 ‘데클란’의 대사다. 데클란은 스코틀랜드의 한 도시 에든버러의 저소득층 주택가에서 가정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미술에 재능을 가졌지만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재능을 펼칠 수 없도록 막는다. 솔즈베리 언덕은 그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세상에 분노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공간이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그곳에서 그는 극단적인 시도를 하려는 ‘리비’를 만난다. 리비는 예술로부터 현실의 벽을 느껴 좌절하던 중 데클란의 그림을 보고 삶에 대한 의지를 얻는다.

리비는 데클란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해야 한다며 그의 이야기를 자신의 새 작품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말이 주인공의 자살, 즉 자신이 죽음임을 알게 된 데클란은 극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지만, 결국 리비는 연극 <마우스피스>를 개막한다. 작품의 끝에선 리비와 데클란의 독백을 교차하며 각자의 결말을 들려준다. 

리비의 이야기 속 데클란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다. 그러나 데클란의 이야기 속 데클란은 솔즈베리 언덕으로 달려가 그림을 찢어 날리며 이렇게 말한다. “다음에 일어날 일은 나한테 달렸어. 다음에 일어날 일은 당신한테 달려 있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진짜 결말 같은 건 없으니까.”

진실한 결말이 무엇인지 결코 정해져 있지 않다. 결말에 대한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이와 같은 극의 마무리는 연극 <마우스피스>를 완벽한 *메타 씨어터 형식의 작품으로 완성해낸다. 관객은 어디까지가 실제 데클란의 삶이고 어디부터가 리비의 창작인지 혼돈하기 시작한다. 모순적이게도 혼돈은 극의 매력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된다.

선과 악의 경계를 확인할 수 없는 관객은 극이 끝난 후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삶 그 자체가 고통이자 사회적 문제인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의무가 있는 예술 사이에서 관객은 길을 잃는다. 현대 사회에선 실존하는 타인의 불행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을 여럿 볼 수 있다.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관객들은 작품 속 실존 인물의 최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연극 <마우스피스>는 예술에 경고를 던지는 예술, 그야말로 ‘예술의 총체’와도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학우라면 언제든 이 작품을 경험하길 간절히 바란다.


*메타씨어터(MetaTheater) : 초월하다는 뜻의 ‘Meta’와 극장을 뜻하는 ‘Theater’를 합친 단어로 ‘극장을 초월한 극장’을 의미함.


법학 21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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