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수많은 여성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여성 해방을 꿈꾼 20세기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이러한 의문을 던졌다. 과거 사회가 여성을 인식하는 방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당시 여성에게 허락된 수식어는 누군가의 엄마, 아내 혹은 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디어엔 자기실현을 중시하는 워커홀릭이나 문제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형사 등 다양한 모습의 여성이 등장한다. 빛나는 여성영화인 뒤엔 이들의 성장과 자립을 지원하는 기업이 있다. 바로 국내 최초 OTT 플랫폼(Platform) 사회적 기업 ‘퍼플레이(Purplay)’다. 여성영화로 성평등을 꿈꾸는 조일지 퍼플레이 대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재생해보자. 


페미니스트가 만든 ‘성평등 OTT’ 
어릴 적 조 대표는 흥미로운 일에 적극 도전하는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던 그는 부모님에겐 불량학생으로 여겨졌다. 그는 “매일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더 신이 나고 재밌게 놀까 궁리하곤 했죠”라며 학창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간호학과에 진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고 이후 지역 방송국 ‘마포 FM’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근무 당시 한국퀴어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만났고 영화제 일을 제안받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4년간 한국퀴어영화제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 산업을 접했다. 이 경험은 훗날 여성영화 상영 OTT 플랫폼(Platform)인 퍼플레이(Purplay)를 설립하는 발판이 됐다.

우연히 친구와 방문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조 대표가 기존 영화 산업에 문제의식을 느낀 계기가 됐다. 첫 영화제에서 본 풍경은 그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영화를 감상하며 밤을 새우고 기념품도 사는 것을 보며 제 외연이 확장된 느낌이었죠”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재밌는 여성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는 “여성영화는 편견이나 투자 부족 등의 이유로 제작부터 개봉까지 이어지기 어려워요”라고 지적했다. 이후에도 그는 여성영화제, 퀴어영화제, 인권영화제 등에 참여하며 여성영화 배급의 필요성을 느꼈다.

퍼플레이 설립의 원동력은 조 대표와 같은 생각을 하는 팀원들이었다. 당시 그와 의기투합했던 팀원들은 모두 직장인이자 페미니스트였다.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만난 이들은 여성에게 불합리한 일이 넘쳐나는 회사를 벗어났다. 이후 여성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단 생각으로 퍼플레이를 설립했다. 그는 “창업 직후라 수익이 없었어요”라며 “생계가 가능한 정도의 수익이 발생할 때까진 다들 본직과 퍼플레이를 겸업하며 고생했죠”라고 창업 초기를 회상했다. 그들이 여성영화를 핵심 콘텐츠로 가져간 이유는 뻔한 캐릭터와 이야기에서 벗어난 여성영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좋아하는 여성영화를 언제든 다시 보고 싶어 퍼플레이를 설립했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퍼플레이는 지난 2017년 창업의 전 과정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가 육성 사업’에 선정돼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오직 당신을 위한 ‘여성영화’ 추천 
퍼플레이는 영화관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영화를 제공한다. 퍼플레이가 정의하는 여성영화란 여성감독이 제작하거나,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성 이분법에 도전하는 영화다. 필름으로 찍은 임순례 감독의 초기작 <우중 산책>을 비롯해 300여 편의 여성영화를 보유한 것은 기존 OTT 플랫폼과 구분되는 퍼플레이의 가장 큰 특징이다. 퍼플레이 영화의 90%는 타 플랫폼에서 서비스하지 않거나 주로 다루지 않는 여성감독의 콘텐츠다. 나머지 10%는 남성 감독의 작품이지만 성 이분법에 도전하는 성평등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퍼플레이는 콘텐츠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한 행보를 이어왔다. 퍼플레이는 여성영화의 인지도 향상을 위해 여성영화 웹매거진 ‘퍼줌’과 여성영화 전문 뉴스레터 ‘퍼플레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성영화 상영회 및 책읽기 모임인 ‘퍼플데이’를 진행 중이다. 조 대표는 “영화를 보는 것이 연대이자 성평등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선한 영향력이 되길 원해요”라고 말했다. 또한 퍼플레이는 ‘여성영화로 여성영화인이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콘텐츠로 얻는 수익의 70%를 창작자에게 돌려준다. 그는 “여성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수익을 바탕으로 여성 서사가 더 많이 등장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섬세한 콘텐츠 선별 과정은 퍼플레이의 또 다른 특징이다. 퍼플레이는 콘텐츠를 제공할 때 작품마다 약 20개의 자체 기준에 맞춰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 팀 내에서 만장일치가 나오면 서비스를 시작한다. 선별 과정이 끝나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키워드에 맞춰 영화를 추천받을 수 있다. 퍼플레이에선 성평등 지표인 *벡델 테스트, **F-등급 통과 여부뿐만 아니라 비건, 1인 가구, 취업 등 자신이 보고 싶은 키워드에 맞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조 대표는 “세분된 선별 과정은 성평등한 콘텐츠가 대중문화로 이어지길 바라는 퍼플레이의 목표에서 비롯해요”라고 설명했다.

성평등 사회를 향한 퍼플레이의 노력은 다양한 국가 기관에서 인정을 받았다. 퍼플레이는 지난해 10월 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최한 ‘양성평등문화지원상’ 단체 부문을 수상했다. 조 대표는 “많은 분과 함께 콘텐츠로 성평등을 이루겠다고 달려온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퍼플레이는 지난 2020년 8월 여성가족부의 ‘여성가족형 우수 예비 사회적 기업’에 선정된 후, 지난해 3월엔 고용노동부에서 ‘국내 OTT 1호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았다.

조 대표는 사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응원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는 “사업 초기엔 영화 계약을 위해 여러 감독과 우편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라며 “서류봉투 안엔 ‘힘내라’는 내용의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죠”라고 말했다. 얼마 전 그는 퍼플레이의 팬이라는 한 작가에게 사인과 응원 문구가 적힌 책을 선물 받았다. 그는 “늘 응원해주는 영화관계자들과 관객들이 있어 매 순간 힘이 나죠”라며 “퍼플레이를 지지하는 분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 어렵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아요”라고 덧붙였다.

퍼플레이, 성평등 사회를 플레이하다
여성영화는 최근 상업적으로 큰 발전을 보이고 있다. 여성 주연 영화 <삼진 그룹 영어토익반> <보건교사 안은영> <82년생 김지영> 등의 흥행이 그 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0년 한국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0년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상업영화에서 여성감독 13.8%, 여성주연 41.4%로 여성 비중이 최근 5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조 대표는 이러한 추세에 대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상이 다양해야 관객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라며 “여성배우가 주인공이고 여성 서사를 가진 영화가 늘어 매우 기뻐요”라고 말했다. 

조 대표는 여성영화의 입지가 더욱 커져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는 수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상업영화와 작품성에 집중한 독립영화로 나뉜다. 영화 길이에 따라선 단편과 장편영화로 구분된다. 퍼플레이의 서비스작은 독립영화와 단편영화가 90%를 차지한다. 독립・단편영화가 많은 이유는 여성영화가 영화계에서 수적 열세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중 여성영화가 상업 진영에서 제작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어요”라며 영화 산업에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제작환경과 문화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퍼플레이가 꿈꾸는 미래엔 여성영화가 아닌 성평등 영화가 있다. 오늘날에도 여성 서사를 담은 영화는 파격적이거나 도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성 1인 가구, 여성의 우정, 데이트 폭력 등의 이야기는 독특한 것이 아닌 여성의 현실이다. 조 대표는 “미래엔 여성영화가 없어지지 않을까요”라며 “더는 여성영화란 타이틀이 아닌 ‘다양성 영화’ ’ 성평등 영화’로 확장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퍼플레이는 앞으로도 기업의 성장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예정이다. 퍼플레이는 이용자 수 확대를 넘어 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펼치려 한다. 조 대표는 “사회적 기업을 꿈꿨던 사업 초기와는 달리 이젠 코스닥에 상장하는 회사로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퍼플레이는 메타버스를 활용해 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는 페스티벌 전문 OTT를 구상 중이다. 온라인 영화제를 주관했던 과거와는 달리 가상의 메타버스 공간에서 누구나 쉽게 영화제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퍼플레이의 다양한 시도는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메시지를 더 많은 대중에게 전달한다.


조일지 대표는 여성영화인, 여성 CEO를 꿈꾸는 이들에게 ‘우리는 모두 각자의 능력을 갖추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한다. 조 대표가 걸어온 발자취는 ‘도전’ 그 자체다. 한국퀴어영화제 사무국장부터 퍼플레이의 대표가 되기까지의 긴 과정에서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시도할수록 응원하고 함께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주저 말고 일단 해보자. 도전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다양한 모습의 여성이 사회에서 활약한다면 우리는 더욱 성평등한 사회를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벡델 테스트 : 영화의 성평등 지수를 가늠하기 위해 고안된 검사임.
**F-등급 : 작품 제작 과정에서 여성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개입했는지를 가리키는 지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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