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서이레 글작가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방 한 켠을 빽빽히 채운 여성 국극 도서가 눈에 들어왔다. 여성 국극은 여성 배우가 한국의 민족성을 담은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연극이다. 본교 한국어문학부를 졸업한 서 작가는 근현대 최고의 여성 국극 배우를 다룬 책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를 빼 보이며 "이 책이  웹툰 「정년이」를 만드는 데 제일 도움이 된 책이에요"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부터 네이버(Naver)에서 연재 중인 웹툰 「정년이」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국극단의 이야기다. 「정년이」의 탄생을 도운 책들을 바라보며 서 작가가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이 궁금해졌다. 웹툰 「보에」부터 「정년이」까지, 본지는 서 작가를 더 알아보려 한다.
 

▲서이레 글작가의 책장 한 켠에 있던 여성 국극 역사책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의 표지다.
▲서이레 글작가의 책장 한 켠에 있던 여성 국극 역사책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의 표지다.



“작가지만 글만 써요”
서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두 여성의 창업 성공기를 담은 웹툰 「보에」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사이보그만 존재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웹툰 「라나」는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을 그린다. 최고의 국극 배우를 희망하는 정년이의 성장기를 담은 웹툰 「정년이」에선 돈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주인공의 욕망이 드러난다. 

웹툰의 이야기를 구상하는 ‘글작가’를 꿈꾸게 된 배경이 궁금해요.
글작가라는 직업을 자세히 알고서 글을 업으로 삼은 건 아니에요. 웹툰 시장이 점차 커지면서 웹툰도 발전해야 했어요. 글작가란 직업은 웹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글과 그림을 분업화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죠. 직업 자체가 생소했기에 글작가가 되고 싶다고 꿈꾼 적은 없지만 중학생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웹툰을 제작하기 위해 그림 작가와 협업하는 과정에서 겪으신 어려움이 있을까요?
누가 제 글을 그림으로 그려준다는 사실이 꿈만 같아요. 그래서 웹툰을 함께 만들면서 그림 작가님과 갈등을 겪은 적이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재능이 없었어요. 그래서 친구한테 제가 쓴 이야기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게 일상이였죠. 웹툰을 만드는 일이 그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웹툰 「정년이」는 드라마화도 거론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웹툰과 드라마란 두 매체는 작가님의 작업에 어떤 차이를 주나요?
「정년이」를 드라마로 만들려면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죠. 노래, 춤, 연기가 다 가능한 배우를 섭외해야 하고 시대극인 만큼 세트장도 마련해야 해요. 반면 웹툰은 연출을 위해 제작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대중성이 있는 매체에요. 그래서 「정년이」는 웹툰으로 연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정년이」의 인물 중 몇몇은 실제 배우를 참고해서 구상했기에 드라마화도 가능하다면 해보고 싶어요. 

미래의 글작가에게 전해줄 말은?
작가를 꿈꾸는 분들은 자신의 글에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해요. 저도 재학생 때 숙대신보 기자로 잠시 활동했어요. 숙대신보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엔 힘들었지만 글에 대한 책임감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제가 시작한 이야기의 인물들에게 끝을 맺어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어요. 어떤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다 보니 글작가로도 계속해서 일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서 작가님에게 숙명여대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제게 숙명여대는 세계를 보여준 장소에요. 전공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눈 시간을 통해 사회를 알게 됐어요. 대학 시절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후회 없이 도전해볼 수 있는 때인 것 같아요. 여러분도 하고 싶은 것을 고민 없이 도전해보는 걸 추천해요.


목포 소녀의 여성 국극 제패기
목포 어시장의 뜨내기 ‘정년’이는 국극배우가 되면 돈을 가마니로 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란국극단에 들어간다. 매란국극단의 단원들은 돈 때문에 국극단에 들어온 정년이를 신기하게 여기거나 불쾌해했다. 그러나 ‘정년’이는 배역에 대한 뛰어난 공감 능력과 진실된 표현으로 단원들과 관객을 사로잡고 진정한 국극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본지와 함께 「정년이」를 따라가며 여성 국극의 한 자락을 누벼보자.

「정년이」가 다루고 있는 여성 국극이란 소재는 어디서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정년이는 대학생 때 전공 서적에 나온 소재를 살린 이야기에요. 한국어문학부 전공자라면 읽게 되는 「한국 문학 통사」란 책이 있어요. 그 책에서 저는 무심코 지나친 한 두 줄 정도의 여성 국극 설명을 본 친구가 흥미 있는 주제라고 추천해줬어요. 여성 국극이나 관련 자료를 많이 찾아본 건 그때부터였죠. 

「정년이」는 ‘2020 양성평등 문화 콘텐츠’에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웹툰 최초로 양성평등 문화 콘텐츠를 수상하신 작가님의 소감이 궁금해요.
‘2020 양성평등 문화 콘텐츠’ 수상은 여성 국극을 대중성 있게 알린 점을 높게 평가해주셨다고 생각해요. 해당 시상을 주관한 여성신문과 더불어 여성 국극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분이 많아요. 「정년이」가 운 좋게도 그런 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정년이」 완결까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앞으로는 양성평등 작품들이 더 많아져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해요.

「정년이」의 등장인물이 가진 특징을 작가님의 언어로 설명한다면?
「정년이」의 등장인물은 20대 후반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제 안의 욕망들을 반영해 만들었어요. ‘정년'이는 수전노나 자린고비처럼 돈을 갈망하는 인물이에요. 영서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동시에 애정이 결핍된 아이며, 그에 비해 주란인 사랑이 넘치는 친구에요. 도앵이는 아버지의 기대 때문에 자기 안의 여성을 혐오하며 본인에게 계속해서 남성성을 부여하는 아이죠. 부용인 아직까진 비밀이 많은 아이라 지금 말씀드리긴 어렵네요. 주란이를 제외한 주인공들이 지닌 욕망은 긍정적이지 않아요. 하지만 주인공 전부가 회차를 거듭하며 자신이 가진 부정적 욕망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가요. 독자들이 이들에게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죠.


서이레의 여성 서사는 ‘미완결’
‘대장금’(2003) ‘선덕여왕’(2009) ‘여인천하’(2001) 등 2000년대 초반에 성행하던 여성 서사 드라마는 2010년대 들어 드물어졌다. 평소 여성 서사 작품을 즐겨봤던 서 작가는 여성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사라져 가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여성 서사에 대한 서 작가의 남다른 관심은 직접적인 여성 서사 창작으로 이어졌다.

여성 서사는 여성 독자만을 겨냥한다는 주장도 있는데요. 여성 서사 장르에 한계가 있을까요?
대중이 아직 여성 서사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대중이 소외된 장르를 더 읽어야만 그런 의견이 해소될 수 있어요.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로맨스를 좋아하는 특정 독자를 노린다는 비판을 받진 않잖아요. 여성 서사는 잘못이 없어요. 여성 서사는 다양한 장르 중 하나의 장르일 뿐이고 특정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진 않죠. 여성 서사를 다루고픈 예비 작가는 타인이 말하는 한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글에 집중하는 게 중요해요. 

본교 학우들에게 추천하는 여성 서사 작품은?
최근에 즐겨본 영국 작가 버나딘 에바리스토(Bernardine Evaristo)의 책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을 소개하고 싶어요.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이자 런던에 있는 극단 운영주에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엔 작가 자신을 투영한 ‘엠마’가 중심인물로 등장해요. 사회적 소수자가 살아가며 겪는 차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인생과 가치관 전부를 다룬 점이 인상 깊었어요. 바다 건너 런던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임에도 책 속 인물들이 낯설게 다가오지 않아 더 재밌게 읽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글작가로서 다루고 싶은 사회 속 여성의 이야기가 있을까요?
시골 여성이 품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저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어요. 시내를 가려면 한 시간 간격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40분 거리를 이동해야 했죠. 한번은 동네에서 이장 선거가 있었어요. 선거가 끝나고, 어머니가 이장이 되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문득 시골에 있는 여성은 어떤 욕망을 품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다음엔 여성이 경험하는 시골에 대해 써보기로 했어요.


본지 기자는 서이레 글작가의 열정에 힘입어 대학 연합 여성 국극 동아리인 ‘아리보네’의 연극 <RE:BORN>을 감상했다. <RE:BORN>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아리보네 구성원이 각색한 극으로 여성 배우만 출연하기에 여성들이 다양한 음역대의 노래를 소화했다. 마초적인 시위대장, 타락한 신부 역을 맡은 여성들의 그늘지고 강인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서 작가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관심사를 향유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흥미에서 비롯된 열정으로 여성 서사의 지평을 넓히는 데 앞장선 서 작가의 창작물이 더 많은 독자에게 닿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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