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칼럼]

필자는 ‘2020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물론 그 생각은 올림픽이 개막하자마자 180도 바뀌었다. 코로나19로 이미 1년 연기된 올림픽이 취소됐다면 이번 여름은 무슨 낙으로 살았을지 걱정될 정도로 이번 여름 방학은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올림픽과 함께였다.

여러 종목을 응원하느라 쉬어버린 목소리가 돌아오고 여운이 가실 때쯤 도쿄 패럴림픽이 개막했다. 입에 탁구채를 물고 경기를 하는 탁구 선수, 팔다리 대신 온 몸통을 위아래로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수영 선수, 입으로 활을 쏘는 양궁 선수를 보았다. 승패를 떠나 그들이 겪었을 시행착오와 노력에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한국 대표팀의 승리 소식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TV를 틀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기 중계와 하이라이트가 방영되던 올림픽 때와는 달리 패럴림픽에 대한 반응은 미지근하다. 패럴림픽 경기를 챙겨보는 관객이 극소수라는 것을 알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국내 방송사 중 중계제작팀을 일본 도쿄 현지에 파견한 방송사는 KBS뿐이고 패럴림픽 소식은 스포츠 뉴스 하이라이트를 통해 겨우 몇 분 비춰지는 수준이다.

많은 사람이 패럴림픽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면서도 패럴림픽이 ‘희망의 아이콘’만으로 소비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패럴림픽 경기를 보고, ‘장애를 극복하고 노력하는 선수도 있는데, 비장애인인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지’란 결론을 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장애인 선수 이상의 도전과 훈련을 했을 선수들의 스포츠맨십에 감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온전한 신체를 가지고 있단 것을 위안으로 삼는 것은 선수와 스포츠에 대한 기만이지 않을까.

몇몇 언론은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도한다. 패럴림픽 선수들의 장애를 가지게 된 과정과 성공담을 극적으로 그려내는 일도 흔하다. 그러나 패럴림픽이 추구하는 평행과 평등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장애가 개인의 특성 중 하나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2022 베이징 동계 패럴림픽’까진 1년 정도가 남았다. 장애가 성별이나 나이와 다름없는 가치 중립적인 특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패럴림픽을 위해 1년 동안의 노력을 고민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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