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4월 11일(목),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앞에서 여성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기쁨에 찬 인파 속 그들이 놓칠세라 꼭 붙든 피켓은 모두 단 하나의 문장을 말하고 있었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헌법재판소는 지난 1월 1일(금) 효력을 잃은 낙태죄에 대해 지난해 12월 31일(목)까지 개정안을 입법하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낙태죄 개정안은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결정을 내린 지 2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발의되지 않고 있다.


태아 인권 앞에 무너지는 여성 인권
낙태(落胎)는 포궁에서 태아의 발육을 인위적으로 중단하는 행위다. ‘태아를 떨어뜨린다’는 뜻의 한자로 이뤄진 낙태라는 용어가 임신 중단을 향한 부정적 시선을 내포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여성은 임신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낙태를 임신 중절로 순화하기도 한다. 한편 지난 2019년 4월 11일(목) 낙태죄가 헌법불합치로 판결된 재판(이하 낙태죄 재판)에선 낙태를 더 넓은 범위에서 정의했다. 모자보건법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태아가 모체 안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기간 내의 낙태로 한정했지만, 낙태죄 재판에서 낙태는 태아가 모체 밖에서도 생존이 가능한 시점의 낙태까지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됐다.

기존 형법은 낙태에 관여한 모든 이들을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법조문은 형법 제269조와 제270조다. 형법 제269조는 임신 기간 전체에 걸친 모든 형태의 낙태를 모두 금지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엔 벌금 혹은 징역을 예정한다. 형법 제270조는 낙태 수술을 진행한 의료인에게 징역을 예고하는 조항이다. 낙태죄는 낙태한 여성뿐 아니라 도움을 준 의료인까지 함께 처벌하는 방식으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를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낙태죄는 신체에 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처벌을 통해 임신 중절을 제재하는 것은 여성이 임신 지속 여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도록 한다. 낙태를 불법 행위로 낙인찍는 사회에서 여성은 낙태에 대한 정보를 얻기조차 쉽지 않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요지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 육아는 여성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낙태를 여성이 선택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혜원(공예 18) 학우는 “낙태죄는 태어나지 않은 존재의 인권은 존중하면서 정작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권리는 고려하지 않는다”며 “낙태죄는 당연히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낙태죄가 존속하던 동안엔 극히 제한적인 낙태 허용 범위가 여성의 건강권 침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은 임신 중단 허용범위를 ▶모체 혹은 배우자가 유전성·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임신 유지가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 ▶법률상 혼인이 불가한 혈족·인척간 임신인 경우 ▶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로 제한한다. 이때 강간에 의한 임신은 임신 중절 수술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료기관으로부터 성폭행 사실을 증명받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강간은 재판이 끝나기까지 보통 2년에서 3년이 걸린다”며 “실제로 성폭행으로 인해 낙태하는 사례는 거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임신 중단을 처벌하는 법률은 오히려 안전하지 않은 불법 임신 중단 수술이 행해질 위험을 키운다. 지난해 10월 25일(일) 세계보건기구(이하 WHO)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최대 13.2%의 산모가 안전하지 않은 임신 중단으로 인해 사망한다. 김 회장은 “낙태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나라들에서 더 많은 부작용과 합병증이 발생했다”며 “현실에선 낙태 시술을 금지할수록 더 많은 낙태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낙태죄는 목적을 잃은 채 협박과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지난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진행된 총 83건의 낙태 관련 재판 중 11건은 여성의 낙태 사실을 폭로할 것이라며 위협을 가한 사건이었다. 포상금을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낙태 시술을 진행하는 병원을 찾아 신고한 사건도 있었다. 낙태죄는 여성에게서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박탈할 뿐 아니라 누군가에겐 협박의 도구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포상금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돼 온 것이다.

환호 속 낙태죄 폐지, 그 이후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재판에서 낙태죄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렸다. 위헌 결정된 낙태죄 조항은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이다.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들이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과잉금지원칙은 국가가 공익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다. 헌법재판소는 해당 조항들에 대해 형벌이 임신 중단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어서 태아의 생명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태아의 생명 보호에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법적 가치의 균형성을 해치므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한다. 이제 여성은 낙태를 선택해도 처벌받지 않고, 낙태 수술을 진행하는 의료진 또한 처벌 대상에서 제외됐다. 김 회장은 “낙태죄 폐지 이후 낙태 사실을 빌미로 여성을 협박하거나 낙태 수술을 몰래 고발하는 행위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은주 정의당 국회의원은 “낙태죄 폐지로 여성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임신을 지속하거나 안전하게 중단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됐다”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에 따라 낙태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개정안이 요구된다. 이 의원은 “지난 1월 1일부로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공적 의료 체계에서 여성이 안전한 임신 중단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위헌 결정을 받은 낙태죄에 형법개정안 심사가 촉구됐지만, 낙태에 대한 의료 체계는 여전히 미비하다. 낙태에 대한 공공 대응 지침이 세워지지 않아 여성들은 낙태 절차의 정확한 안내를 받을 수 없다.

지난해 10월 7일(수)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등은 형법과 모자보건법 일부에 대한 개정안을 입법하겠다고 예고했다. 형법 개정안은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를 허용하고 14주를 기준으로 낙태의 허용 요건을 차등 규정했다. 법무부 형사법제과는 “낙태를 일률적으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명시해 여성의 자기결정권 실현과 태아의 생명 보호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선 유산 유도제를 허용하는 근거를 마련해 임신 중단 시술 방법의 선택권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임신 중단 시술과 관련해선 당사자의 서면 동의 규정을 마련하고 배우자의 동의 요건을 삭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누구를 위한 개정인가
개정안이 공개되자 낙태죄 전면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난해 10월 5일(월) 시작돼 11월 3일(화) 마감된 ‘낙태죄 전면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은 10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서 보건복지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다. 해당 청원은 임신 주수에 따라 임신 중단을 선별적으로 제한하는 방침은 여전히 여성의 신체권 행사를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5일(목) 낙태죄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는 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이 의원은 “임신 중단 수술을 임신 주수에 따라 제한하는 방안은 낙태죄 폐지가 아닌 낙태죄 존치와도 같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장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해 어떤 임신 중단도 범죄로 다뤄지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낙태죄의 전면 폐지를 반대하는 입장도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로 구성된 ‘낙태법특별위원회’는 지난해 12월 28일(월) 형법 개정안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입장문에서 산부인과 의료계는 낙태죄의 전면 폐지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낙태죄 전면 폐지는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이다”며 “낙태죄 폐지에 있어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규제를 풀어버리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김 회장은 “임신 22주차 여성의 낙태 수술을 집도한 의사에게 실형이 선고된 적 있다”며 “모든 주수의 낙태를 허용하는 조치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살인죄를 지고 가라는 말과도 같다”고 말했다.

제한 없이 낙태할 수 있는 기한을 더 축소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낙태법특별위원회는 입장문에서 여성이 아무 조건 없이 낙태할 수 있는 기간을 개정안의 임신 14주가 아닌 임신 10주 미만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회장은 “낙태로 인한 합병증은 임신 10주에서부터 주수에 비례해 증가한다”며 “10주는 모체의 건강상 가장 안전한 주수다”고 말했다.

낙태법특별위원회는 임신 중단 약물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에 임신 중단 약물을 도입하는 데 근거가 되는 조항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약물 낙태는 수술보다 약 6배 많은 출혈이 발생해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낙태를 위한 약물이 합법화되더라도 산부인과 병·의원의 안전한 진료 행위 아래 철저하게 관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신 중단 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있을지에 관한 논쟁도 뜨겁다. 지난 1월 14일(목) 제안된 국민건강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면 임신 중단에 건강보험 급여를 지급할 법적 근거가 생긴다. 해당 개정안을 공동 발의한 이 의원은 “임신 중단 수술은 더 이상 불법 행위가 아니므로 건강보험의 적용은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절차다”며 “임신 중단 수술에 건강보험 급여를 지급하면 안전한 임신 중단 수술의 접근성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임신 중절 수술에 건강보험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김 회장은 “사회ㆍ경제적인 사유로 진행된 임신 중단은 개인의 선택일 뿐 질병으로 볼 수 없어 건강보험 취지에 어긋난다”며 “낙태에 건강보험이 적용되더라도 대다수 환자는 진료기록을 남기지 않기를 원하므로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근로기준법의 낙태 관련 조항도 개정을 논의 중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여성의 유산과 사산을 휴가 사유로 규정하지만, 낙태에 따른 유산은 휴가 사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임신 중단 수술을 받은 여성에게도 법정휴가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이 의원은 “임신 중단도 출산이나 자연 유산과 비슷한 수준으로 여성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임신 중단을 선택한 여성 노동자에게도 차별 없이 건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여성이 ‘낙태죄 선고 결과, 헌법불합치’의 외침이 울려 퍼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여성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권리가 퇴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나라의 사회 발달 수준을 판단하려면 그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도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권을 존중받는 선진 사회로 나아가려면 가장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부터 선행돼야 한다. 따라서 여성의 기본권 보장을 중심으로 한 낙태죄 개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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